에메 세제르

Aimé Césaire
공산주의 프랑스 마르티니크 1913–2008 ○ 자연사

네그리튀드 공동 창시자, 식민주의 비판의 선구

「내 차례다. 하나의 등식을 제시하겠다: 식민주의 = 사물화」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유럽이 나치즘으로 규정한 방법을 이미 식민지 민족에게 써 왔으며 나치즘은 식민주의를 정당화한 문명의 자연적 귀결이라고 논했다.

마르티니크 바스푸앵트에서 세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에서 상고르·다마스와 함께 네그리튀드 운동을 열었다. 잡지 L'Étudiant noir는 1934~1935년에 창간되었고, 1935년 5~6월호에서 '네그리튀드'가 처음 현재적 의미로 쓰였다. 프란츠 파농을 가르쳤다. 1945년 공산당의 지원으로 당선돼 56년간 포르드프랑스 시장, 47년간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고 1946년 마르티니크를 프랑스 데파르트망으로 만든 법을 통과시켰다. 1956년 10월 24일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흐루쇼프 보고와 마그레브 탄압을 들어 공산당과 결별했으며, 영어권 서술은 헝가리 혁명 탄압을 탈당 사유로 든다. 1958년 마르티니크 진보당을 창당하고 2001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네그리튀드에서 마르티니크 정치까지

마르티니크 바스푸앵트 출신으로 아버지는 세무원(공세 징수관), 어머니는 양재사였다. 가족은 그가 섬에서 유일한 중등학교였던 포르드프랑스의 빅토르 셰르셰르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이주했고, 이후 파리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장학생으로 가서 상고르를 만나고 다마스와 재회했다. 상고르·다마스와 함께 L'Étudiant noir를 창간했으며, '네그리튀드'라는 말은 1935년 5~6월자 제3호에서 처음 현재적 의미로 쓰였다. 창간 연도는 영어권 서술이 1935년, 프랑스어 위키백과가 1934년 9월로 갈린다. 저널 창간 무렵 파리에서 활동한 나르달 자매의 살롱과 La Revue du Monde Noir도 네그리튀드 운동의 주요 지적 영향이었으나 이후 서술에서 축소되었다.

포르드프랑스의 셰르셰르 고등학교에서 가르쳤고 프란츠 파농이 그의 제자였다. 파농의 지적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원고를 처음 읽은 사람이었으며,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세제르의 말과 행동이 지닌 해방적 효과를 증언했다.

1941년 아내 수잔 루시와 함께 르네 메닐, 아리스티드 모주 등 마르티니크 지식인들과 잡지 Tropiques를 창간해 문화적 소외에 맞섰다. 이 잡지는 로베르 제독의 탄압적 비시 체제 아래에서 검열을 겪으며 1943년까지 어렵게 발간되었다. 장시 『고향으로의 귀환 수첩』은 1939년 Volontés지에 처음 실렸고, 앙드레 브르통의 추천사를 붙인 단행본은 1947년에 나왔다. 브르통은 이를 두고 '우리 시대 최고의 서정적 기념비'라고 했다.

1945년 프랑스 공산당의 지원으로 포르드프랑스 시장과 마르티니크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46년 3월 19일 만장일치로 통과된 마르티니크 데파르트망 편입 법안을 이끌었다. 프랑스어 위키백과는 시장 재임을 1945년 5월 27일부터 2001년 3월 19일까지(55년 9개월), 의원 재임을 1945년 11월 6일부터 1993년 4월 1일까지(47년 4개월)로 적고, 1945년 12월 공산당에 입당했다고 전한다. 브리태니커는 당적 시기를 1946~1956년으로 잡아 이 점에서 차이가 있다.

1950년 『식민주의 담론』에서 '식민지화=사물화'를 제시하고, 나치즘은 유럽 역사의 예외가 아니라 식민주의를 정당화한 문명의 자연적 귀결이라고 논했다. 유럽인들이 훗날 나치즘으로 규정한 방법을 이미 비유럽 민족에게 정당화해 왔으며, 히틀러는 20세기의 '매우 고귀하고 매우 인문주의적이며 매우 기독교적인 부르주아'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제국주의 부메랑 이론의 출처이자 탈식민·반식민 사상의 기초 텍스트로 평가된다. 1950년 에디시옹 레클람에서 처음 나왔고 1955년 Présence africaine에서 재출간되었으며 1972년 조앤 핑컴의 영어 번역본이 Monthly Review에서 출간되었다.

1956년 10월 24일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로 프랑스 공산당과 결별했다. 프랑스어 위키백과는 흐루쇼프 보고가 드러낸 스탈린의 범죄(그는 이를 '경악과 고통과 수치의 나락'에 빠뜨렸다고 했다)와 탈스탈린화에 대한 당의 모호한 태도, 알제리를 포함한 마그레브에서 탄압 정책을 편 기 몰레 정부에 당이 전권을 위임한 것을 사유로 든다. 영어권 서술은 헝가리 혁명 진압 이후 소련에 대한 환멸을 결별의 계기로 제시한다. 두 서술은 실질적으로 갈리며, 마그레브 문제는 프랑스어권 서술에서만 명시된다.

1958년 3월 22일 마르티니크 진보당(PPM)을 창당해 자치를 내걸었고 2005년 6월 14일까지 당수를 지냈다. 국민의회에서는 1958~1978년 무소속, 1978~1993년 사회당 계열로 활동했다. 1983~1988년 마르티니크 지역의회 의장을 지냈고, 1993년 47년 만에 의원직을, 2001년 시장직을 끝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2006년에는 2005년 2월 23일 법률 제4조 제2항이 교과서에 해외, 특히 북아프리카에서의 프랑스 존재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하도록 규정한 데 항의해 니콜라 사르코지를 만나기를 거부했다. 해당 조항은 2006년 2월 15일 칙령으로 폐기되었다. 프랑스어 위키백과는 논란 조항 폐기와 파트리크 카람의 중재로 그가 같은 해 3월 사르코지를 접견하며 '새로운 사람'이라고 평했다고만 전한다.

2008년 4월 9일 심장 질환으로 포르드프랑스의 피에르 조브다키트만 병원에 입원했고 4월 17일 향년 94세로 사망했다. 4월 20일 스타드 드 딜롱에서 국가장이 거행되었으며, 오랜 벗이자 부시장을 지낸 피에르 알리케르가 추도사를 했다. 2007년 1월 15일 르 라망탱 공항이 마르티니크 에메 세제르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바꿨고, 2011년 4월 6일 판테온 추모가 열렸다. 프랑스어 위키백과는 그의 정치 노선이 동화주의(데파르트망 편입)와 독립, 자치 사이를 오갔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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