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회복의 경제학자 정치가, 최단명 총리
1991년 1월 12~13일 밤 빌뉴스의 시설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가족과 함께 드루스키닌카이로 스스로 물러나 숨았고, 1월 13일 빌뉴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게디미나스 바그노리우스가 정부를 맡고 있었다.
알베르타스 시메나스는 1950년 2월 17일 아니크슈차이 지역의 파필리아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빌뉴스대학에서 경제수학을 전공하고 1981년 경제학 후보 학위를 받았으며, 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소에서 근무한 뒤 강의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에 서명했고, 1991년 1월 10일부터 13일까지 총리를 지냈다. 이후 경제장관과 1996~2000년 세이마스 의원, 2000~2017년 리투아니아 철도 간부로 일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91 정부·행정 · 리투아니아 국가기관
경력 연표
- 1950리투아니아 파필리아이에서 출생
- 1972–1984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기관 경제학자
- 1984–1989빌뉴스 공학건설대 경제학 강사, 1989년 부교수
- 1990–1992최고회의 의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 서명자
- 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1월 10일~13일)
- 1991–1992경제장관
- 1996–2000리투아니아 공화국 세이마스 의원, 경제위원회 위원장
- 2000–2017리투아니아 철도 개발담당 이사(2006년까지) 및 부총국장(2006~2017)
관련 역사 사건
독립 회복과 1991년 1월의 사흘 총리직
리투아니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1990년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에 서명한 서명자이며 1991년 1월 10일부터 13일까지 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를 지냈다.
초기 경력과 독립 운동
1950년 2월 17일 아니크슈차이 지역 파필리아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1956년 안탈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 1967년 트로슈쿠나이 중등학교를 마쳤고, 1967~1972년 빌뉴스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해 경제학자·수학자 자격을 받았다. 1972~1973년 리투아니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전산센터에서 경제학자로, 1973~1984년 인민경제계획경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1981년 사회과학 후보 학위를 받았고, 1984~1989년 빌뉴스 공학건설대학에서 강의했으며 1989년 부교수가 되었다. 1989~1990년 리투아니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경제학 분야에서 약 60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사유디스를 통해 정치에 들어섰고, 1990년 2월 24일 드루스키닌카이 선거구 제62호에서 최고회의-재건 세이마스 의원으로 선출되어 1990~1992년 의원을 지냈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국가 재건에 관한 법률에 찬성표를 던졌다.
1991년 1월, 사흘의 총리직과 드루스키닌카이 사건
두 번째 정부는 1991년 1월 10일 공식 업무를 시작했으며, 각료 구성은 프룬스키에네 정부와 거의 같고 총리만 바뀌었다. 시메나스에 따르면 세이마스 표결은 대략 찬성 78표, 반대 1표, 나머지 기권이었고 그는 직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최고회의 의장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다시 제안을 받아들였다. 기록원에 따르면 그는 1월 10일 20시경 총리로 임명되었고, 1월 13일 5시경 해임되어 재임 기간이 약 57시간으로 리투아니아 역사상 가장 짧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내각은 동요를 막고 도발을 피하며 부처 기능을 유지하고 새로운 점령 가능성에 대비하는 데 주력했고, 점령 시 대외 대표 권한을 외무장관 알기르다스 사우다르가스에게 넘기고 정당한 정부가 계속 존재하며 점령 권력은 불법이라는 점을 공표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는 모스크바의 강한 압박과 소련 지도부에 대한 응답 없는 접촉 시도를 언급했다.
1월 12일 저녁 빌뉴스의 시설이 습격당했다는 정보를 받은 뒤 그는 가족과 함께 드루스키닌카이로 물러났다. 1월 13일 사건 관련 재판에서 그는 쿠데타 세력으로부터 숨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에게 자신의 소재를 알렸다고 진술했다. 8월 1월 1991년 1월 8일 '예딘스트바' 집회와 최고회의 진입 시도는 실질적으로 권력 교체를 노린 것이었다고 그는 평가했다.
그의 귀환 날짜에 대해서는 사료가 엇갈린다. 영어 위키백과는 그가 소련군의 빌뉴스 진입 무렵 사라졌다가 1월 14일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서술하는 반면, 리투아니아 쪽 사료들은 그가 1월 13일에 빌뉴스로 돌아왔고 바그노리우스 내각이 그날부터 활동을 시작했다고 본다. 이 항목은 한쪽 날짜로 확정하지 않고 두 서술을 병기한다. 1월 13일 그날 회의에 나타나지 않아 찾을 수 없었기에 최고회의는 그와 내각을 즉시 해임하고 게디미나스 바그노리우스를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이후 경력과 평가
세 번째 정부의 경제장관으로 임명되어 1991년 5월 30일부터 1992년까지 재임했고, 1992~1996년 경제 및 민영화 연구소 부소장 겸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1996~2000년 세이마스 의원으로 경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000년 리투아니아 경제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 2000~2006년 리투아니아 철도 개발담당 이사, 2006~2017년 부총국장으로 일했다. 1994년부터 기독민주당, 2001년부터 리투아니아 기독민주당, 2008년부터 조국동맹-리투아니아 기독민주당 소속이었다. 2000년 7월 1일 리투아니아 독립 훈장을 받았고, 1996년 저서 '리투아니아의 경제 개혁'을 출간했으며 다수의 법안과 수정안을 발의하거나 공동 발의했다.
자신의 총리 시기에 대한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93년 리투아니아 기록서에는 가장 짧은 기간 총리 재임자로 등재되었다. 후일 인터뷰에서 그는 사흘 동안 내각이 필요한 결정을 내리고 중요한 시기에 부처를 계속 운영했으며 도발을 피했다고 평가했고, 1월 12~13일 밤에 관해서는 좌우 진영 간 정치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며 언급을 꺼렸다. 이 사건을 다룬 게디미나스 일구나스의 연구서 '두 번째 정부: 총리의 비밀(1991년 1월 10~13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