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콜차크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4–1920 ✕ 총살형

북극에서 총살형장까지, 제정의 마지막 무장 방어자

"파리에 있는 내 아내에게 내가 아들을 축복한다고 전해주실 수 있겠소?" — 1920년 2월 7일, 총살 집행대 앞에서 사령관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북극 탐험가이자 해양학자로 이름을 떨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트함대와 흑해함대를 지휘했고 함대 사령관 중 유일하게 니콜라이 2세의 퇴위에 반대했으며, 1918년 11월 옴스크 쿠데타로 '전러시아 최고 통치자'에 추대되어 시베리아 백군을 이끌었으나 1920년 2월 볼셰비키에 총살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북극 탐험과 과학 연구 (1900-1906)

콜차크의 삶에서 가장 독창적인 기여는 정치가나 군 지휘관이 아니라 북극 탐험가이자 해양학자로서의 업적이다. 1899년 해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일본해와 황해의 해류를 관측한 첫 과학 논문을 발표했고, 이를 접한 러시아 극지 탐험의 대가 에두아르트 톨 남작은 그를 1900년 러시아 극지 탐험대의 수문학자 겸 지도제작자로 영입했다. 탐험선 자랴호를 타고 타이미르반도와 노보시비르스크 제도를 탐사하며 500베르스타(약 530km)의 개썰매 측량을 수행했고, 톨은 일기에서 '우리의 수문학자 콜차크는 훌륭한 전문가이며 탐험의 목표에 헌신적이다'라고 기록했다.

1902년 톨이 세 명의 대원과 함께 베네트섬으로 떠난 뒤 실종되자, 콜차크는 아카데미에 자신이 직접 구조 원정을 이끌겠다고 청원했다. 1903년 5월, 17명의 대원과 고래보트 한 척, 개썰매 10대로 구성된 구조대를 이끌고 야나강 하구에서 노보시비르스크 제도를 가로질러 베네트섬까지 얼음바다를 건넜다. 빙하의 크레바스에 빠져 의식을 잃는 사고를 겪으면서도 섬에 도착해 톨이 남긴 최후의 기록을 발견했다. 톨 일행의 생존 가능성이 없음을 확인했지만, 콜차크는 대원 전원을 무사히 귀환시켰고, 새 지리적 대상을 발견·기록했으며 해안선을 수정했다.

러시아 지리학회의 표트르 세묘노프-탼샨스키는 이 원정을 '중요한 지리적 위업'으로 평가했다. 1906년 콜차크는 프리티오프 난센, 아돌프 노르덴셸드, 니콜라이 위르겐스에 이어 네 번째로 지리학회 최고 영예인 콘스탄틴 대금메달을 수상했고, 이 무렵부터 '콜차크-폴랴르니(극지의 콜차크)'라는 별칭으로 러시아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1909년 출간한 방대한 논문 「카라해와 시베리아해의 얼음」에서 북극 얼음 덩어리가 시계 방향으로 순환한다는 발견을 제시했으며, 이는 극지 해양학의 기초를 수립한 연구로 평가된다. 같은 해 그가 설계에 참여한 쇄빙선 타이미르와 바이가치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배치되어 베링해협 탐사를 수행했다.

최고 통치자와 백색 시베리아의 몰락 (1918-1920)

콜차크가 전쟁 영웅에서 정치적 지도자로 변모한 것은 1918년 11월 18일 옴스크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였다. SR 계열 인사들이 주도하던 전러시아 임시정부(디렉토리야)의 군사·해군 장관으로 취임한 지 불과 2주 만에, 카데트당과 연계된 장교단이 디렉토리야를 전복하고 각료회의는 콜차크를 '전러시아 최고 통치자'로 추대했다. 스스로 "군사 기술자일 뿐 정치에는 어둡다"고 말했으나, 이제 그는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절대권력자가 되었다. 그의 권위는 안톤 데니킨 등 백색운동의 다른 지도자들로부터 공식 승인받았다.

1918년 12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콜차크의 시베리아군은 페름과 우파를 함락시키고 카잔과 사마라에 접근하며 볼가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통제 영역은 30만 제곱킬로미터 이상, 인구 700만 명에 달했고, 레닌은 콜차크를 가장 위험한 적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1919년 4월 말 붉은군대 동부전선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전황은 급변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이끄는 붉은군대는 우파를 탈환하고 우랄산맥을 돌파했으며, 11월 14일 백색 수도 옴스크를 함락시켰다.

콜차크 정권은 러시아 제국의 금 보유고(6억 5천만 금루블 이상)를 장악하고 있었고, 그중 일부를 연합국에 군수물자 대금으로 송금했다. 11월 13일 옴스크를 탈출한 콜차크는 남은 금과 함께 열차로 이르쿠츠크를 향했으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통제하는 구간에서 수주간 지연되다 12월 말 니즈네우딘스크에 사실상 억류되었다. 체코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는 대가로 1920년 1월 15일 콜차크를 이르쿠츠크 정치중심에 넘겼다.

1월 21일부터 2월 6일까지 이어진 볼셰비키 혁명위원회의 심문에서 콜차크는 자신의 행동을 상세히 설명하면서도 유죄를 부인했다. 당초 모스크바 공개재판이 계획되었으나, 카펠 장군이 이끄는 백군 잔존 부대가 이르쿠츠크에 접근하자 크렘린은 즉결 처형을 지시했다. 2월 7일 새벽, 콜차크는 빅토르 페펠랴예프 전 총리와 함께 총살되었고 시신은 앙가라강 얼음 아래 버려졌다. 그의 죽음은 백색 시베리아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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