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독재를 설계한 내전기 최고의 식량 행정관
그가 굶주림으로 열차에서 실신했다는 일화가 전하지만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다. 1939년 영화 장면으로 퍼졌고 후대 선전에서 유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레닌이 1919년 6월 봉급을 두 배로 올리라고 지시한 일은 문헌으로 확인된다.
1870년 알료시키(현 우크라이나 올레슈키)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대가정에서 자랐고, 1891년 마르크스주의 학생 서클을 조직했다. 1893년 체포되어 헤르손 농업학교에서 제적된 뒤 통계사로 일했고, 1898년 RSDLP에 입당해 우파와 하르코프에서 이스크라 요원으로 활동하다 1902년 올로네츠현 3년 유형을 받았다. 1917년 우파 소비에트와 시두마를 이끌며 페트로그라드로 곡물을 보냈고, 1918년 2월부터 1921년 12월까지 식량인민위원으로서 5월 8일 식량 독재를 제안하고 곡물 분견대와 빈농위원회를 조직했다. 이후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고스플란 의장을 지냈다. 1928년 5월 크림에서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3–1925 경제·재정·계획 · 소련 · 중앙계획 기관
경력 연표
- 1893–1898헤르손 농업학교 제적 후 통계사·농업기사, 사회민주주의 선전 활동
- 1898RSDLP 입당, 이스크라 요원으로 우파·하르코프에서 활동
- 1902–1904체포되어 올로네츠현으로 3년 유형, 1904년 11월 우파로 복귀
- 1905–1917우파현에서 쿠구셰프 공작 영지 관리인으로 위장한 볼셰비키 지하 활동
- 1917우파 RSDLP(b) 위원·시두마 의장, 페트로그라드로 곡물 열차 수송 조직
- 1917–19211917년 11월 식량인민위원 대리, 1918년 2월 25일부터 1921년 12월 2일까지 RSFSR 식량인민위원으로서 식량 독재·곡물 징발제·무장 식량분견대 주도
- 1921–1923RSFSR·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 1923–1925소련 인민위원회의 산하 고스플란 의장, 1925~26년 통제 수치로 연례 계획 수립 개시
- 1925–1926소련 대외·국내무역인민위원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우파 볼셰비키 조직가우파에서 쿠구셰프 공작 영지 관리인으로 위장 취업해 1905년 파업과 지하인쇄소를 조직했으며, 이스크라 요원으로 활동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식량인민위원식량인민위원으로 1918년 5월 식량독재령을 집행했고, 식량군을 조직해 곡물 강제 징발 체계를 총괄했다.
- 1921–19221921~1922년 대기근식량인민위원1918년 5월 식량독재 법령을 입안하고 무장 식량분견대와 곡물 징발제를 지휘했다. 그의 징발 체계가 농민의 파종 여력을 고갈시켜 기근의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식량인민위원
식량 독재 체제: 법령, 기구, 인간적 대가
1918년 5월 8일, 추루파는 인민위원회의에서 식량인민위원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포고령 초안을 보고했다. 레닌은 이 자리에서 '무자비하고 테러리즘적인 투쟁과 전쟁'을 곡물 은닉 농민에게 선포할 것을 직접 지시하며 초안을 수정했고, 5월 13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는 식량 독재 법령을 정식 통과시켰다. 이 법령은 잉여 곡물을 보유하고도 국가 수집소에 내놓지 않는 자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해 10년 이상 징역, 전 재산 몰수, 공동체 영구 추방에 처하도록 했다.
추루파가 이끈 식량인민위원부는 약 14만 5천 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유통 기구로 성장했으며, 레닌은 이를 두고 '추루파는 최고의 인민위원부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무장 식량분견대(프로도트랴드)는 도시 노동자와 빈농으로 편성되어 농촌으로 파견되었고, 빈농위원회(콤베드)는 현지에서 쿨라크의 곡물을 적발·징발하는 역할을 맡았다. 식량분견대는 징발한 곡물의 절반을 자신을 파견한 도시 조직에, 나머지 절반을 식량인민위원부에 납부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막대한 인적 비용을 동반했다. 올란도 파이지스에 따르면 1918년 7~8월 두 달 동안에만 농민과 곡물 징발대 간의 폭력적 충돌이 약 200건 발생했고, 식량분견대는 종종 차르 경찰의 행태를 재현했다. 추루파 자신도 '분견대가 차르 경찰과 똑같이 행동했다'고 인정한 바 있다. 식량 독재는 붉은 군대와 도시를 기아로부터 구했지만, 동시에 소비에트 권력과 농민 대중 사이에 내전 기간 내내 치유되지 않은 사회적 균열을 남겼다. 1921년 네프 도입과 함께 현물세로 전환되면서 식량 독재 체제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징발 실적은 1918~19년 1억 790만 푸드, 1919~20년 2억 1,250만 푸드, 1920~21년 3억 6,700만 푸드로 늘어났다. 1919년 1월 11일 인민위원회의 포고령으로 곡물강제징발제(프로드라즈뵤르스트카)가 전국으로 확대된 뒤에는 각 현에 할당량이 배정되고 그것이 다시 마을과 가구 단위로 분할되었다.
식량인민위원부 이후: 부총리, 노농감독부, 고스플란 (1921~1928)
식량인민위원부를 넘겨준 뒤 추루파는 정부와 계획 기구로 옮겼다. 1921~23년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을, 1921년 12월 2일부터 노동국방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23년 7월 6일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 인민위원회의와 노동국방회의의 부의장이었다. 1923~1928년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었고, 1922~1928년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와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 위원을 지냈다.
1922년 5월 6일 그는 스탈린의 뒤를 이어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노농감독인민위원이 되어 1923년 4월 28일까지 재임했다. 앞서 스탈린이 노농감독부를 이끌 때 두 사람은 식량 공급 문제로 충돌했으며, 노농감독부의 감사는 추루파의 부서를 '매우 불완전하고 번거롭고 비싸며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평가했지만 레닌은 이 판단에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23년 12월 11일부터 1925년 11월 18일까지 그는 G. M. 크르지자놉스키의 두 임기 사이에 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을 맡았다. 고스플란은 1925년 연간 '통제 수치', 곧 경제 전 부문의 목표를 정한 1925~26년 지침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정례적인 연간 국가 계획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어 위키백과는 그를 '5개년 계획 구상의 창시자'라 부르지만, 한 학술 서술은 연간 통제 수치와 함께 5개년 계획을 준비하자는 구상을 1925년 고스플란 의장 크르지자놉스키의 것으로 보므로 이 평가는 사실로 단정할 수 없다. 1925년 11월 18일부터 1926년 1월 16일까지는 통합된 소련 대외·국내 상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인민위원이었고, 후임은 레프 카메네프였다.
그는 고위직에 있었지만 주요 정치인은 아니었다. 내전기에 그를 만난 빅토르 세르주는 그를 '멋진 흰 수염과 순진한 눈을 지닌 사람… 그러나 거짓말을 불어넣은 사람들로 가득한 사무실에 갇힌 포로'라고 묘사했다. 한 연대기는 그를 지극히 정직하지만 유토피아적 이념에 사로잡혀 스탈린과 거듭 충돌한 인물로 그리며, 부하 거의 모두와 달리 이른 죽음 덕분에 탄압을 피했다고 적는다.
그는 1928년 5월 8일 크림의 무할라트카에서 요양 중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화장되어 유골함이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일부 자료는 사망일을 1928년 5월 7일로 전하지만, 연도와 장소는 모두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