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데오 보르디가

Amadeo Bordiga
이탈리아 공산당 공산주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1889–1970 ○ 자연사

의회주의를 거부하고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한 좌파공산주의 이론가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을 붙이려는 것이다. 때가 오면 불꽃이 타오를 것이다." — 1912년, 나폴리 카를 마르크스 서클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창립자이자 좌파공산주의 이론가. 의회선거 거부와 '불변의 혁명 프로그램'을 주창했고 레닌과 직접 논쟁했다. 축출 후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하는 독자적 이론을 전개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코민테른 안의 분열과 제명(1919~1930)

10월 혁명 뒤 보르디가는 이탈리아 사회당 안에 공산주의 기권파를 조직했다. 기권파라는 이름은 부르주아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나왔다. 1919년 볼로냐 대회에서 그는 당명을 공산당으로 바꾸고 필리포 투라티의 개량파를 내보내자고 제안했다. 사회당은 그해 코민테른 가입을 결의했지만 개량파를 정리하지 않았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한 보르디가는 레닌이 내놓은 가입 조건에 두 항목을 더하게 했다. 같은 해 레닌은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에서 그의 의회 기권론을 비판했다.

1921년 1월 리보르노 대회에서 코민테른 대표들은 개량파를 내보내야 한다는 데는 한목소리였지만, 자친토 메노티 세라티와 계속 함께할지를 두고는 갈렸다. 보르디가는 투라티와 세라티 모두와 곧바로 갈라서자고 주장했고, 코민테른 수석 대표 파울 레비의 반대를 누르고 이를 관철했다. 새로 생긴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그는 집행부 다섯 명 가운데 하나였으나 실제로는 당 활동 전체를 지휘했다. 같은 해 코민테른이 개량주의 조직과의 통일전선 전술을 채택하자, 보르디가는 이를 전쟁 전 사회민주주의의 실패한 전술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보았다. 그와 동지들은 규율을 지켜 결정을 받아들였지만 처지는 점점 어려워졌다.

1923년 2월 무솔리니 정부가 조작된 혐의로 그를 체포하면서 그는 중앙위원 자리를 내놓았다. 그해 무죄로 풀려났지만 자리를 되찾지 않았고, 사실상 반대파의 위치를 받아들였다. 1924년 6~7월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그는 사회당들과의 어떤 협력에도 반대하며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을 주장한 유일한 목소리였다. 무솔리니와 파시즘의 부상도 "부르주아 계급 통치 인원의 교체"일 뿐이라고 보았다. 같은 해 당권은 모스크바에 가까운 그람시의 그룹으로 넘어갔고, 그람시가 6월 서기장이 되었다. 1925년 3월 보르디가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전원회의에 가기를 거부했고, 궐석 상태에서 트로츠키와 완전히 연대한다며 코민테른에 적대적 입장을 취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1926년 1월 리옹 대회에서 좌파는 소수파가 되었다. 그는 곧이어 열린 코민테른 제6차 확대 집행위원회에 참석했다.

1926년 12월 그는 다시 체포되어 우스티카섬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그람시와 만나 정치적 차이에도 함께 지냈다. 1928년 폰차섬으로 옮겨졌다가 1929년 풀려났다. 석방 뒤 당 활동에 돌아가지 않았고, 1930년 3월 "트로츠키 반대파의 입장을 지지·옹호·승인했다"는 혐의로 제명되었다. 이후 1943년까지 정치 활동에서 물러났다.

당과 강령

보르디가에게 당은 레닌의 전위당 개념과 달리 계급의 유기적 표현이었다. 당은 노동계급 외부에서 의식을 주입하는 엘리트 집단이 아니라, 계급 자체의 역사적 운동이 조직적 형태를 갖춘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변의 혁명 강령'을 주창했다. 공산주의는 실현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실제 운동이며, 당의 임무는 이 강령을 타협 없이 보존하는 것이다. 그는 1921년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보았다. 코민테른이 통일전선 전술과 신경제정책을 채택한 것은 혁명의 썰물기에 굴복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사회민주주의 좌파를 흡수해 대중적 영향력을 확보하려 할 때, 보르디가는 '강령이 전부이며 숫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맞섰다. 썰물기 당의 역할은 일시적 인기가 아니라 강령을 지키고 선전 활동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는 트로츠키주의가 소련 관료제의 타락을 1927년으로 보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이었다. 이 입장은 그를 코민테른으로부터 고립시켰지만 후대 초좌파와 좌파공산주의 전통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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