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동창에서 비판자로: 소련 의회의 마지막 의장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내가 제5차 인민대표대회를 주재하면, 의원들이 8월 민주주의 승리의 모든 성과를 무효화할까 봐 두려워했다.” — 체포 이유에 대한 루키야노프의 설명.
아나톨리 루키야노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헌법적 틀을 설계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한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다. 고르바초프의 대학 동기로 1977년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당 중앙위 총무부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1991)에 올랐다. 초기 개혁을 지지했으나 연방 해체를 우려하며 보수파로 돌아섰고, 1991년 8월 쿠데타 동조 혐의로 체포되어 15개월 수감되었다. 석방 후 주가노프와 함께 러시아연방 공산당을 창당했고 2003년까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다. 법학 박사이자 '아나톨리 오세네프'라는 필명으로 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소비에트 제도에 끝까지 충성한 마지막 지식인 관료였다.
경력 연표
- 1956–1961소련 각료회의 법률위원회 수석 컨설턴트
- 1961–1976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선임 레페렌트, 부서 부장
- 1977–198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사무국장
- 1983–1985CPSU 중앙위 총무부 제1부부장
- 1985–1987CPSU 중앙위 총무부장
- 1987–1988CPSU 중앙위 서기 (법률·행정 담당)
- 1988–1990CPSU 정치국 후보위원
- 1990–1991소련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93–2003러시아연방 국가두마 의원 (CPRF)
관련 역사 사건
헌법의 필경사, 필명으로 시를 쓴 법률가
아나톨리 루키야노프는 1930년 스몰렌스크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 법학부에서 고르바초프와 같은 시기에 공부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후 40년을 이어진다. 국가법 학자로 출발한 그는 소비에트 국가기구의 원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7년 브레즈네프 헌법의 초안 작업에 참여했다. 발전된 사회주의의 법적 자화상을 그린 이 문서는 그의 세계관 그 자체였다. 소비에트 체제는 법의 형식을 갖춘 질서이며, 그 형식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믿음이었다.
당 기구에서 그는 문서와 절차의 대가로 성장해 중앙위원회 총무부장까지 올랐다. 스탈린 시대 이래 권력의 서류 흐름을 쥐는 이 자리는 겉보기보다 훨씬 큰 힘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얼굴도 있었다. 「오세네프」라는 필명으로 시집을 낸 서정시인이었던 것이다. 절차의 인간이 품은 이 서정성은, 훗날 감옥에서 시를 쓰는 만년의 모습을 예고하고 있었다.
개혁 의회의 의장, 문지기인가 브레이크인가
정치개혁으로 태어난 새 의회에서 루키야노프는 처음에는 고르바초프의 제1부의장으로, 1990년 3월부터는 소련 최고회의 의장으로 의사봉을 잡았다. 수천 명의 대의원이 처음 해 보는 의회정치를 그는 절차의 기술로 다스렸다. 발언 순서와 표결 방식과 의사일정을 쥔 그는, 지지자들에게는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명의장이었고 비판자들에게는 개혁 법안을 절차의 미로에 가두는 문지기였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두 번째 얼굴로 기울었다. 연방 해체의 공포 속에서 그는 보수파의 의회 내 거점이 되어 갔다. 1991년 6월 파블로프가 비상 권한을 요구한 비공개 회의를 주재한 것도, 신연방조약이 헌법을 침식한다는 성명을 쿠데타 개시일 아침 신문에 실은 것도 그였다.
40년 지기 고르바초프가 포로스에 갇힌 사흘 동안, 루키야노프는 쿠데타에 정식으로 가담하지 않은 채 의회 소집을 미루며 사태를 관망했다. 바로 그 애매함이 그의 몫의 책임이 되었다.
감옥의 시, 두마의 노인
쿠데타 실패 일주일 뒤 루키야노프는 「이데올로그」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감방에서 그는 시를 썼고, 그 시들은 옥중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 명단에 이름이 없던 그가 주모자급으로 다뤄진 데 대해 본인은 끝까지 항변했다. 자신이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음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소집할 의회가 쿠데타를 합법화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94년 사면으로 풀려난 그는 공산당 소속으로 국가두마에 세 차례 당선되어 헌법입법위원회를 이끌었다. 소련 헌법을 쓰던 손으로 러시아연방의 법률을 다듬는 만년이었다. 2019년 그는 88세로 죽었다.
법학자들에게 루키야노프는 하나의 사례 연구로 남아 있다. 법의 형식에 대한 헌신이 법이 섬겨야 할 것에 대한 질문과 갈라설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는 소비에트 합법성의 마지막 수호자였고, 그 합법성이 스스로를 해체하는 것만은 끝내 합법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