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민족정치와 당 중앙집권 사이에 선 지도자
1948년 소련과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베오그라드의 감옥에서 사라졌다.
안드리야 헤브란그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크로아티아 공산당의 전시 지도자로, 점령에 맞선 조직과 해방지대의 정치 건설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경제 재건과 중공업 중심의 발전 계획을 주도하며 티토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자치적 정치 표현과 경제 노선을 둘러싼 긴장은 티토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정보망과 연계된 인물로 지목되어 당에서 축출되고 체포되었으며, 1949년 감옥에서 사라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19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 1925–1928자그레브 지방 당 조직 활동
- 1941–1944크로아티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서기
- 1943–1944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원
- 1944–1946국가반파시스트평의회와 산업·무역 행정 담당
- 1946–1948경제위원회 의장, 계획위원회 의장
- 1948당에서 축출, 가택연금과 체포
- 1949베오그라드 감옥에서 실종, 사망 처리
관련 역사 사건
감옥 12년, 1928~1941: "붉은 대학"과 파벌 투쟁
헤브란그는 1928년 9월 7일 자그레브에서 비밀 당 문서고가 있던 구둘리체바 거리 앞에서 미하일 브라네시와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국가보호법 아래에서 공산주의는 정권 전복 행위로 규정되어 있었다. 베오그라드의 국가보호재판소는 1928년 11월 13일 그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고, 그는 레포글라바에서 복역하다 1933년 말 또는 1935년 스리옘스카미트로비차로 이송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이른바 "붉은 대학" 과정을 통해 정치경제학과 역사, 민족 문제, 노동조합 및 농민 문제를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옥중 당 조직은 내부 분열로 갈라졌다. 스리옘스카미트로비차에서 페트코 밀레티치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정권 타도에서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을 주장하는 세력을 "우파 기회주의"라 규정하며 헤브란그를 공격했고, 그를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었다. 헤브란그는 모샤 피야데의 지지를 받아 감옥 당국의 탄압에 대한 무조건적 충돌 대신 획득한 편의를 수감자 교육에 활용하자고 주장했고, 이 노선 차이는 1937년 8월 6일 밀레티치 측의 암살 시도로 폭발했다. 헤브란그는 스스로 독방을 택했다. 옥중의 이 대립은 그가 "우파"로 지목되는 첫 경험이었고, 밀레티치는 이후 파벌 투쟁자로서 숙청되었다.
형기는 1941년 2월 15일 만료되었지만 그는 선고된 기간보다 여섯 달을 더 수감되어 있었다. 석방 직후 자그레브로 돌아가 3월 크로아티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