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미하일로브나 판크라토바

Анна Михайловна Панкратова
소련 러시아 1897–1957 ○ 자연사

스탈린 사후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한 노동계급사 권위자: 소련 최초 여성 역사학 아카데미크

1953년 『역사의 제문제』 주필이 된 판크라토바는 스탈린의 『단기 강좌』 도식을 공개 토론에 부치며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추진했다. 1957년 3월 중앙위 결정은 그녀의 노선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로 규탄하고 사실상 해임했다.

소비에트 노동계급사와 혁명운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약 200편의 저작을 남겼다. 소련 역사학 분야 최초의 여성 정회원(아카데미크)이자, 카자흐스탄사의 첫 종합적 집필을 지도했다. 스탈린 사후 『역사의 제문제』 주필로서 「소련 공산당사 단기 강좌」의 도식적 서사를 재검토하고 탈스탈린화를 주도했으나, 1957년 중앙위로부터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실질적으로 해임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36년의 시련: 남편 고발, 제명, 그리고 생환

판크라토바는 붉은 교수양성소 시절 만난 역사가 그리고리 야코빈(본명 미텔만)과 결혼해 1925년 딸 마야를 낳았다. 그러나 야코빈은 트로츠키 좌익반대파의 핵심 활동가로 전향했고, 판크라토바는 1927년 공개석상에서 남편을 비판하며 그와 결별했다. 야코빈은 1928년 체포되어 중앙아시아 유형에 처해졌고, 판크라토바는 1929년 당과 OGPU의 승인 아래 타슈켄트의 교도소로 찾아가 남편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야코빈은 1938년 3월 1일 보르쿠타에서 총살되었다.

1936년 8월, 모스크바 첫 쇼재판 직후 붉은 교수양성소 당 조직은 판크라토바를 소환했다. 그녀는 '트로츠키스트 전남편과의 관계를 은폐하고 적을 적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만장일치 제명되었다. 판크라토바는 스스로를 '썩은 자유주의의 대표자'라고 자책하며 '당과 헤어진다는 것은 삶과 헤어지는 것'이라고 고백했고, 친구와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가정부에게 구조되었다. 이후 사라토프 대학으로 사실상 유배되어 3년간 딸과 떨어져 지냈다. 1938년 당에 복권되었고, 이듬해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극적인 개인사는 나움 코르자빈의 장시 「탄카」(1957)의 소재가 되었다. 코르자빈은 당의 '딸'로서 사랑과 양심을 당에 바친 한 여성의 비극을 노래했고, 판크라토바의 후손과 동시대인들은 그녀를 시의 실제 모델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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