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지 정부를 떠나 카다르의 혁명 노농 정부에 들어간 노동조합 출신 공산주의 지도자
도장공 출신으로 1931년 헝가리 공산당에 들어가 건설노동자 파업을 조직했다. 1945년 이후 당 노동조합 부서와 전국노동조합평의회를 이끌었고, 1953년 노동인민당 정치국에 복귀해 부총리가 되었다. 1956년 10월 27일 너지 임레의 국민정부에 부총리로 들어갔으나 11월 초 토콜의 소련군 사령부로 넘어가, 카다르 야노시의 혁명 노농 정부에서 공업장관을 맡았다. 이후 오래 부총리를 지냈고 1971~1984년 국회의장을 지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1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 1935건설노동자 파업을 조직했다.
- 1948–1951전국노동조합평의회 서기장
- 1953.11노동인민당 정치국 복귀, 부총리
- 1956.10.27너지 임레 국민정부의 부총리 겸 건설장관
- 1956.11.04카다르 야노시의 혁명 노농 정부 공업장관
- 1958.01–1961.09제1부총리
- 1971.05–1984.12국회의장
1956년 11월, 너지 정부의 부총리에서 카다르 정부의 공업장관으로
1956년 10월 23일 밤 노동인민당 중앙위원회는 어프로 언털을 새로 만든 군사위원회의 책임자로 뽑았다. 이튿날 그는 내부 지시문에서 봉기 참가자들을 「파시스트 폭도」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10월 27일 너지 임레가 꾸린 국민정부에 부총리 겸 건설장관으로 들어갔고, 이튿날에는 당을 이끌 간부회에도 들어갔다.
소련 지도부가 두 번째 개입을 결정한 뒤인 11월 2일, 그는 부다페스트 남쪽 토콜에 있는 소련군 사령부로 넘어갔고, 거기서 솔노크로 옮겨졌다. 11월 4일 새벽 소련군의 공격과 함께 방송되고 전단으로 뿌려진 「헝가리 근로 인민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는 카다르 야노시, 코셔 이슈트반, 뮌니히 페렌츠와 함께 그의 이름이 첫머리에 올랐다. 서한은 네 사람이 11월 1일 너지 정부와의 관계를 끊고 혁명 노농 정부 수립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발표된 정부 명단에서 그는 공업장관을 맡았다.
11월 7일 그는 카다르가 새로 세운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임시집행위원회에 들어갔고, 12월부터 그 경제위원회를 이끌었다. 1957년 다시 부총리가 된 그는 너지 임레와 동료들의 재판을 직접 감독했고, 1958년 6월 17일 국회에서 그들의 처형을 「인민의 정당한 응징」이라고 발표했다. 부다페스트의 입말에서 그의 이름은 카다르, 되게이와 함께 1956년 이후 강경한 보복 정치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