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보네츠로 네프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스탈린 체제에서 이탈한 첫 고위 금융 관료
1922년 2월 28일, 레닌이 셰인만에게: "현재 국가은행은 관료적 서류 게임일 뿐이다. 달콤한 공산주의-관료적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듣고 싶다면, 이것이 진실이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로, 1917년 헬싱키 소비에트 의장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1921~1924년과 1926~1929년 두 차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맡아 금태환 체르보네츠를 도입, 네프 시기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레닌으로부터 "관료적 서류 게임"이라는 신랄한 질책을 받았지만, 바로 그 제도 구축이 화폐 안정을 가능케 했다. 1929년 해외 출장 중 소환을 거부해 초기 네보즈브라셰네츠가 되었고, 대숙청을 피해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경력 연표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7헬싱키 소비에트 의장 · 제헌의회 의원
- 1918–1919스톡홀름 주재 재무관
- 1920–1921그루지야 주재 전권대표
- 1921–1924국가은행 총재 (1차) · 체르보네츠 도입
- 1926–1929국가은행 총재 (2차) · 소환 거부, 망명
- 1933–1939인투리스트 런던 지부장 · 영국 귀화
- 1944런던에서 사망
관련 역사 사건
1929년 망명: 소환 거부와 금고 열쇠
1929년 4월, 베를린에 있던 셰인만은 소련으로의 소환을 거부했다. 당시 그는 국가은행 총재로서 소련의 금 보유량, 해외 계좌, 대외 채무 협상의 전모를 속속들이 아는 인물이었다.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아벨 예누키제가 베를린으로 급파되어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셰인만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거짓된 발걸음을 내디뎠고, 소련으로 가는 모든 길은 완전히 끊어졌다'고 답했다. 그는 자신을 정신병자로 선언하거나 감금해도 저항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모스크바로 돌아가라는 요구만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셰인만에게는 협상 카드가 있었다. 그는 베를린의 한 은행 금고에 보관된 당 중앙위원회 자금의 열쇠를 갖고 있었고, 예누키제에게 '언제든 열쇠와 회계 보고를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오토 쿠시넨의 아내 아이노 쿠시넨의 회고에 따르면, 이후 모스크바에서 당 지도부가 그의 금고를 열어보았을 때 그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으며 셰인만이 해외에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미리 빼돌린 후였다.
통상적인 경우였다면 셰인만은 제거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련 지도부는 협상에 나섰고, 거의 3년에 걸친 논의 끝에 1932년 11월 정치국은 그에게 해외 소비에트 기관에서 일자리를 주기로 결정했다. 1933년부터 그는 런던에서 인투리스트 지부를 이끌었고, 반소 활동을 하지 않는 대가로 급여 인상까지 받았다. 전 동료들이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는 가운데, 셰인만은 1939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런던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았다. 소련 최초의 고위급 네보즈브라셰네츠가 체제와 맺은 이 특이한 거래는 그가 쥐고 있던 정보의 위력과 스탈린조차 무시할 수 없었던 금융 전문성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