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즈네프 시대의 당 규율 수호자, 라트비아 출신 정치국원
1918년 모스크바 레온티옙스키 골목에서 체카 청사 폭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체카 직원이었던 펠셰는 현장에서 부상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혁명 초기 비밀경찰 본부를 뒤흔든 이 폭발 사건은 그가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경로에 자리한 초기 위기 중 하나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브레즈네프 시대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으로 17년간 당 규율을 총괄했다. 비러시아계로 소련 최고지도부에 오른 드문 인물이며,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산업화를 주도했다.
경력 연표
- 1915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76차 당대회 대의원, 10월혁명 참가
- 1918모스크바 체카 직원
- 1919–1929적군 및 해군에서 정치·교육 업무
- 1941–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6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6–1983정치국 정위원 겸 당통제위원회 의장
관련 역사 사건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과 제1서기 시절 (1959–1966)
1959년 흐루쇼프는 라트비아 공산당 내에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이른바 '라트비아적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민족공산주의자들(에두아르트 베르클라우스 등)은 민족주의 일탈 혐의로 축출되었다. 펠셰는 이 숙청의 설계자였다. 1959년 7월부터 1962년까지 여섯 단계에 걸쳐 진행된 이 숙청으로 당 간부와 활동가 약 2,000명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얀 칼른베르진š 제1서기마저 교체되었다. 1959년 11월 25일 펠셰가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라트비아 공산당 내 자율적 노선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이후 라트비아 지도부는 모스크바에 완전히 예속되는 구도로 재편되었다.
제1서기로서 펠셰는 급속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라트비아의 도시 인구는 마침내 농촌 인구를 넘어서 유럽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리가 영화 스튜디오, 다일레스 극장 등 문화 시설도 확충되었고 라트비아 오페라와 바그너·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이 공연되었다. 그러나 라트비아인 다수에게 펠셰는 러시아화와 소비에트화의 도구로 인식되었으며 극도로 인기가 없었다.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펠셰의 이름을 딴 리가 공과대학 건물에서 그의 기념 명판이 군중에 의해 철거되어 다우가바 강에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