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아미 파블로비치 자베냐긴

Авраамий Павлович Завеняг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56 사인 미확정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노릴스크, 원자폭탄까지 스탈린 시대 산업 건설의 조직자

「자베냐긴은 강인하고 결단력 있으며 지나치리만치 주도적인 책임자였다. 과학자들의 의견을 잘 경청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대단한 지성의 소유자였고, 동시에 완전히 스탈린주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회고)

1930년 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를 용광로 전문으로 졸업한 광산·야금 기술자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소장을 거쳐 1938년부터 노릴스크 광산·야금 콤비나트 건설을 노릴라그 수용소 노동력으로 지휘했고, 1941년 3월부터 1946년 8월까지 NKVD 부인민위원으로 굴라그의 산업건설 기구들을 총괄했다. 원자력 계획에서는 1944년 12월 우라늄 탐사 책임을 맡았고, 1945년 8월부터 제1총국 제1부책임자 겸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특수수용자 노동력을 감독했으며 1949년 첫 핵실험을 앞두고 RDS-1 조립을 책임졌다. 1955년 중형기계공업 장관이 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노릴스크와 수용소 노동: 지휘, 「자베냐긴의 법칙」, 상반된 증언

1935년 6월 23일 인민위원회 결정 제1275-198сс호로 노릴스크 니켈 콤비나트 건설이 정해지고 노릴스크 교정노동수용소(노릴라그)가 편성되었다. 자베냐긴은 1938년 4월 8일부터 1941년 3월 29일까지 이 건설의 책임자였다. 착공 당시 수용자는 약 8천 명이었고 1939년 말에는 1만 9천 명을 넘었다. 1939년 3월 6일 첫 공업적 용련이 있었고, 1942년 4월 29일 노릴스크는 첫 금속 니켈을 생산했다. 그는 공장 설계가 조빙(매트) 제련까지만 정한 데 반해 노릴스크에 완전한 야금 순환을 두는 방안을 주장했다. 노릴스크에서 그는 자신과 부하들에게 「자베냐긴의 법칙」을 세웠는데, 비인간적 조건에서의 최대 노동, 구원(자기 자신의 구원 포함)은 비범한 결정에 있다, 젊음은 결점보다 이점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노릴스크는 수용소 노동 위에 세워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릴라그에서 7,223명이 죽었으며, 주된 사인은 수용자들에게 거의 먹이지 못한 것이었다. 굴라그 수용소 체계 전체에서 전쟁 중 가장 참혹했던 1942년에는 수용자 거의 네 명 중 한 명이 죽었다. 이러한 기록과 관련해 자료들은 그에 대한 평가에서 갈린다. 헝가리 작가이자 노릴라그 수용자였던 요제프 렌델은 그를 '인간적'이었던 노릴스크 책임자로 그리며, 수용자들을 잘 먹였고 그가 작업 현장에 오면 누구든 호위 없이 다가가 말할 수 있었으며, 수용자를 묶고 발로 찬 경비원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고 증언했다. 반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그를 만난 적이 없으면서도 그를 '전설적인 베르투하이(수용소 경비)'라 부르고 베리아의 총애와 한 경비원의 호평으로 미루어 '짐승이 출중했다'고 추론했다.

이 대립하는 증언들은 확정된 사실로서가 아니라 각각의 회고와 주장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문서로 확인되는 것은 수용소 노동과 그 사망률이며, 렌델의 인간적 초상과 솔제니친의 적대적 추론은 그 위에 놓인 상반된 평가로서 병기된다.

원자폭탄 계획의 실무 총괄자

자베냐긴은 1943년부터 우라늄 문제에 관여했고, 1944년 12월 국방위원회 결정으로 소련 전역과 점령지에서의 우라늄 탐사를 총괄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NKVD 제9총국이 편성되었다. 1945년 8월 특별위원회가 출범하자 그는 제1총국(PGU) 제1부책임자로 임명되어 특수수용자 노동력 관리, 광산·선광·야금 시설 건설, 과학기술 인력 충원을 책임졌다. 같은 해 그의 지휘 아래 독일의 핵물리학자·화학자·야금학자 70여 명이 소련으로 이송되었고, 1948년까지 300명 이상으로 늘어난 이들은 '독일 연구소'에서 농축우라늄과 금속플루토늄 생산 기술을 개발했다. 동시에 소련 통제 구역 전역에서 우라늄 원광과 반제품을 압수·수집하여 1946년 중반까지 순우라늄 환산 220톤을 확보했다.

자베냐긴은 마야크(첼랴빈스크-40), 아르자마스-16, 크라스노야르스크-26 등 폐쇄도시와 공장 부지 선정 및 건설을 직접 지휘했다. 1948년 6~7월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원자로 A-1의 두 차례 사고 수습을 현장에서 지휘하며 과다 피폭되었다. 1949년 8월 19일 RDS-1 핵탄두를 KB-11에서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까지 운송하고 최종 조립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지정되었으며, 8월 29일 밤 그의 입회 아래 중성자 기폭장치가 탄체 중심부에 삽입되었다. 실험 직후 그는 차량으로 폭심지까지 진입했다가 방사성 먼지에 차가 멈추는 바람에 도보로 귀환해야 했고, 이때 치명적인 방사선량을 흡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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