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했던 이들이 배신하고 나를 '인민의 적'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 더러운 수사를 피해 붉은 군대로 도망쳤다.
바쿠 유전 지대에서 성장한 석유 기술자로, 30대에 소련 석유산업을 이끌며 '바이바코프 공법'으로 불리는 고압 시멘트 주입 기술을 개발했다. 전시에는 코카서스 유전 방어의 극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전후에는 로마슈키노 유전 개발을 주도하며 소련의 산유 대국화에 기여했다. 1965년부터 20년간 고스플란 의장으로 코시긴 개혁 이후의 중앙계획경제를 상징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계획 관료제의 핵심 축으로서 고르바초프 초기까지 버텼다.
경력 연표
- 1940s석유산업 인민위원/장관으로 전시 에너지 공급을 관리
- 1942독일 진격기 코카서스 유전 파괴 대비와 석유 생산 이전 임무 수행
- 1955–1957고스플란 의장으로 처음 중앙계획을 지휘
- 1965–1985국가계획위원회 의장, 코시긴 개혁 이후 장기 계획경제 운영
- 1985 이후고르바초프 초기 교체, 장기 정체기 계획관료의 상징으로 남음
관련 역사 사건
1942년, 스탈린의 양자택일
1942년 여름, 독일군이 코카서스로 진격하자 스탈린은 당시 석유산업 부인민위원이던 바이바코프를 크렘린으로 긴급 호출했다. 스탈린은 "코카서스 유전을 독일군에게 한 방울이라도 남기면 총살할 것이고, 유전을 파괴했는데 독일군이 진격하지 않으면 역시 총살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로 임무를 하달했다. 바이바코프는 극한의 선택지 앞에서 실무적 판단을 내렸다: 독일군이 접근하면 저생산 유정을 먼저 폐쇄하고, 고생산 유정은 극한 상황까지 가동한 뒤 최후에 파괴하는 방침이었다. 그 결과 귀중한 장비는 동부로 대피시켰고, 크라스노다르 유전의 핵심 자원은 독일군이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임무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남았고, 후일 회고록에서도 가장 깊이 각인된 순간으로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