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가브릴로비치 체르니솁스키

Николай Гаврилович Чернышевский
러시아 러시아 1828–1889 ○ 뇌출혈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써서 레닌 세대를 만든 혁명적 민주주의자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2판 후기에서 체르니솁스키를 '위대한 러시아 학자이자 비평가'라고 불렀고, 엥겔스는 그와 도브롤류보프를 '사회주의적 레싱들'이라 칭했다.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가로, 『소브레멘니크』를 이끌며 유물론 미학과 농업사회주의를 정립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독방에서 쓴 『무엇을 할 것인가?』(1863)는 두 세대 혁명가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경력 연표

『예술의 현실에 대한 미학적 관계』 (1855)

체르니솁스키의 석사논문 『예술의 현실에 대한 미학적 관계』(1855)는 러시아 유물론 미학의 선언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것은 삶이다(прекрасное есть жизнь)"라고 선언하며, 예술이 미를 창조한다는 관념론 미학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예술의 임무는 삶을 재현하고 설명하며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것, 즉 '인생의 교과서'가 되는 것이다. 자연과 현실이 어떤 예술 작품보다 우월하다는 그의 주장은 당대 '예술을 위한 예술'론에 대한 선전포고였고, 관객이 예술을 통해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 변혁적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촉구했다. 이 논문은 이후 플레하노프, 루나차르스키를 거쳐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까지 이어지는 러시아 혁명적 예술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체포, 민사처형,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 (1862–1883)

1862년 7월 7일 체르니솁스키는 '지주 농민들에게 바치는 그들의 은인의 절'이라는 선동문 작성 혐의로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알렉세옙스키 라벨린 독방에 수감되었다. 헌병대와 비밀경찰의 내부 문서에서 그는 '러시아 제국의 적 1호'로 불렸다. 체포의 직접적 빌미는 게르첸이 니콜라이 세르노-솔로비예비치에게 보낸 편지가 경찰에 의해 가로채지면서, 금지된 『소브레멘니크』를 런던에서 발행하자는 제안 속에 체르니솁스키의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수사는 약 1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 체르니솁스키는 수사위원회의 위법 행위에 항의하며 9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678일의 수감 기간 동안 그는 최소 200인쇄장 분량의 원고를 써냈으며, 이 기간의 산물이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1863)였다. 검열관이 이 소설을 연애 이야기로 오인하여 통과시키자 『소브레멘니크』 3·4·5호에 연재되었고, 즉시 금서가 되었으나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864년 2월 7일 상원의원 카르니올린-핀스키는 체르니솁스키에게 14년 카토르가형(중노동형) 후 시베리아 종신 유형을 선고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카토르가 기간을 7년으로 단축했다. 같은 해 5월 19일(31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미트닌스카야 광장에서 민사처형이 거행되었다. 군중 앞에서 무릎 꿇린 체르니솁스키의 머리 위로 칼이 부러지고 그는 기둥에 사슬로 묶였다. 그러나 굴욕을 주려던 이 의식은 역효과를 냈다. 빗속에서 군중은 침묵했고, 누군가 꽃다발을 던졌다. 체르니솁스키는 이 조롱극 내내 평온하게 서 있었다.

이후 그는 네르친스크의 카다야 탄광과 알렉산드롭스키 자보트에서 카토르가 노동을 했고, 1871년 빌류이스크로 이송되었다. 1874년 공식적으로 석방이 제안되었으나 그는 사면 청원서 제출을 거부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탈출을 시도한 두 차례의 대담한 작전이 있었다. 1871년 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위원이었던 게르만 로파틴이 이르쿠츠크에 잠입해 탈출을 준비했으나 체포되었고, 1875년 이폴리트 미시킨은 헌병 장교 복장과 위조 공문서를 갖추고 빌류이스크에 접근했으나 발각되어 체포, 후에 처형되었다. 체르니솁스키는 1883년이 되어서야 유럽 러시아로의 귀환을 허락받아 아스트라한으로 이주했고, 감옥·카토르가·유형 생활은 총 21년을 넘겼다.

『무엇을 할 것인가?』 (1863)

체르니솁스키가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독방에서 1862년 12월부터 1863년 4월까지 석 달 반 만에 써낸 『무엇을 할 것인가?』는 러시아 혁명 운동의 '복음서'였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응답으로 기획된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의 외피 아래 여성 해방, 협동조합적 생산, '합리적 이기주의'라는 급진 사상을 담았다. 검열을 통과해 『소브레멘니크』에 연재되자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고, 즉시 금서가 되었으나 필사본으로 전국에 퍼졌다. 주인공 베라 파블로브나가 운영한 봉제 공동체는 현실에서 수십 개의 유사 공동체를 낳았고, '특별한 인간' 라흐메토프는 금욕적 직업혁명가의 전형이 되었다. 레닌은 "이 책이 나를 완전히 갈아엎었다"고 회고했으며, 크로포트킨, 플레하노프, 마야콥스키를 비롯한 세대 전체가 이 작품을 삶의 지침서로 삼았다. 레닌이 1902년 자신의 강령적 저작에 같은 제목을 붙인 것은 체르니솁스키에 대한 직접적 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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