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0–1964 ○ 자연사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합참의 만장일치 반대를 꺾은 유엔군 사령관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 1951년 4월 19일 의회 고별연설에서 한 말.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점령을 사실상 통치한 미국의 5성 원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만주 폭격과 확전을 주장하며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고, 1951년 4월 해임되었다. 그의 해임은 민간 통제와 군부의 관계를 둘러싼 냉전기 가장 첨예한 헌정적 논쟁으로 남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51년 해임과 민간 통제 논쟁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공개 성명으로 맥아더의 모든 지휘권을 박탈하고 매튜 리지웨이 중장에게 이양하도록 명했다. 백악관의 해명은 맥아더가 "미국 정부와 유엔의 정책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같은 성명에서 정책에 대한 활발한 토론은 헌법 체계의 핵심 요소이지만 군 지휘관은 "법과 헌법이 정한 방식으로 발령된 정책과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못박았다. 4월 6일 백악관 회의에서 해리먼은 해임을 적극 지지했고 브래들리는 반대했으며, 마셜은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애치슨은 개인적으로는 해임에 찬성했으나 이를 밝히지 않고 "임기 중 최대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4월 8일 합동참모본부는 군사적 견해로는 해임이 바람직하지만 결정적 고려는 아니라고 보았고, "만약 해임하지 않으면 민간 당국이 더는 군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많은 국민이 비난할 것"을 우려했다. 다음 날 트루먼은 일기에 해임이 만장일치로 권고되었다고 적었다.

사태의 직접적 계기는 정책에 대한 공개 반박이었다. 맥아더는 1950년 12월 1일 압록강 이북 작전 제한이 "군사 역사상 전례 없는 막대한 제약"이라고 답했고, 12월 6일 국무부 사전 승인 지시에도 1951년 2월 13일과 3월 7일 유사한 발언을 반복했다. 3월 23일에는 중국에 대한 휴전을 시사하며, 유엔이 작전을 확대하면 중국이 "즉각적인 군사적 붕괴"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공표했는데, 트루먼은 이 성명이 자신의 휴전 제의를 앞질렀다고 보았다. 4월 5일에는 3월 20일자 서한이 하원에서 낭독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아시아가 공산주의의 전지구적 공세의 무대이며 "승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해임 사유를 두고는 기록이 갈린다.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가 합참의 직접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증거는 거의 없으며 그가 "합참 지침을 확대 해석했으나 법적으로 위반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트루먼은 1956년 회고록에서야 항명을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1973년 시사주간지 기사에는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아서 해임했다"는 1960년대 초 발언이 인용되었다.

충격과 반응도 컸다. 일본 중의원은 맥아더에 대한 감사 결의를 채택했고, 방일 경험이 없는 외국 인사를 찾아간 첫 사례로 기록된 히로히토 천황의 주일 미국대사관 방문이 이어졌다. 미국에서는 시카고 트리뷴에 실린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의 탄핵 요구, 영국 노동당 정부의 압력 때문에 해임되었다는 일부 신문과 공화당 원내 간부 케네스 워리의 주장이 나왔다. 육군장관 프랭크 페이스가 한국에서 직접 통고할 예정이었으나 통신 장애로 전달되지 않아, 도쿄에서는 상업 라디오 방송으로 먼저 소식을 접했다. 5~6월 상원 군사·외교위원회 합동 조사는 해임이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 내에 있었으나 그 경위는 국민적 자존심에 충격이었다"고 결론지었다. 해임은 이후 미군 내부의 정치적 발언을 억제하는 선례로 자주 인용되었으나, 그 경위와 적절성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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