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바르트

Emil Barth

혁명적 직장위원 의장이자 인민대표평의회에서 가장 급진적이었던 위원

독일의 혁명가·정치가.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배관공으로, 1906년 무렵 사회민주당과 독일금속노동자연맹에 들어갔다. 전쟁에 반대해 베를린 금속공업의 혁명적 직장위원 모임에 가담했고,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으로 옮겼다. 1918년 2월 리하르트 뮐러를 이어 직장위원 의장이 되었고, 11월 혁명정부인 인민대표평의회에 독립사회민주당 몫으로 들어갔다가 12월 29일 사임했다. 1921년 사회민주당에 돌아갔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혁명적 직장위원에서 인민대표평의회로

바르트에 대해서는 아직 전기가 없고 자료가 적으며, 그의 삶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1919년 펴낸 그 자신의 회고록이다. 그는 처음에는 무정부주의에 공감했다고 전해지며, 1902~1909년 여러 법원에서 다섯 번 징역형을 받았다.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당과 노동조합이 지지한 전쟁 정책과 전쟁공채 찬성에 격렬히 반대했고, 베를린 금속공업의 반대파 간부들이 만든 혁명적 직장위원 모임에 가담했다.

1918년 2월 9일 직장위원 회의에서, 다시 징집된 리하르트 뮐러의 권유로 그는 의장직을 맡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을 혁명의 참모장처럼 그렸고 무기와 돈을 모았다고 썼지만, 뮐러는 11월 9일 봉기에서 그의 지도적 역할을 강하게 부인했다. 11월 2일 회의에서 40명의 직장위원 가운데 21명이 11월 4일 대중 파업에 반대해 행동은 11일로 미뤄졌고, 실제 혁명은 그 전에 터졌다.

리프크네히트와 레데부어가 「샤이데만파」와의 협력을 거부하자, 하제의 제안으로 바르트가 디트만과 함께 인민대표평의회 위원이 되었다. 11월 10일 부슈 서커스장에서 열린 노동자·병사 평의회 총회의 의장을 맡은 그는 평의회에서 사회정책을 맡았으나, 안에서는 늘 5대 1로 밀렸다고 썼다. 그는 병사들이 장교들의 옛 규율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고, 혁명을 「임금 운동으로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2월 29일 에베르트가 인민해군사단을 진압한 데 항의해 사임했다. 그의 회고록은 뒤에 우파가 좌파의 「등 뒤에서 찌르기」를 주장하는 증거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