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외교의 경계에 선 핀란드 장군
1941년 한여름,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사상 최대인 10만 병력의 카렐리야군을 하인리히스에게 맡겨 스비르 강과 오네가 호수 방면 공세를 맡겼다.
에리크 하인리히스는 핀란드의 군인으로, 만네르헤임과 가까이 일하며 전쟁 지휘와 군사참모 업무를 함께 맡았다. 겨울전쟁에서 카렐리야 지협 방어를 지휘한 그는 1941년 독일과의 군사 협력을 조율한 뒤 카렐리야군 사령관으로 공세를 이끌었다. 전후에는 무기 은닉 사건의 여파로 군 경력을 마쳤지만, 1948년 모스크바 협상과 만네르헤임 전기 집필에 참여하며 군사 전문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15–1918독일에서 핀란드 엽병으로 군사훈련과 동부전선 전투에 참여
- 1918핀란드 내전에서 제7 엽병대대 지휘
- 1931–1938제1사단 사령관
- 1939–1940겨울전쟁에서 제3군단과 카렐리야 지협군 지휘
- 1940–1941핀란드 육군 총참모장, 1941년 독일과의 군사 협의에 참여
- 1941–1942카렐리야군 사령관으로 동카렐리야 공세 지휘
- 1942–1944총참모장으로 전쟁 수행과 독일군 연락 담당
- 1945핀란드 국방군 총사령관, 무기 은닉 사건 뒤 사임
관련 역사 사건
1945년 국방군 총사령관과 무기 은닉 사건
만네르헤임은 1945년 1월 하인리히스를 자신의 후임 국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새 총사령관 앞에는 라피 전쟁, 군대 해산, 지뢰 제거, 국경의 군사적 정리라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여기에 1945년 봄에 드러난 무기 은닉 사건이 더해져 그의 군 경력은 그해 여름 끝났다.
무기 은닉은 계속전쟁 뒤 소련이 핀란드를 점령할 경우를 대비해 무기를 전국에 분산 은닉하고 게릴라전을 가능하게 하려 한 비밀 작전이었다. 공식 명칭은 분산 저장이었고 무기 은닉이라는 이름은 언론이 붙인 것이었다. 총사령부의 명령과 지휘로 실행되었고 37개 방위군구의 장교들이 주도했으며, 처음에는 약 8000명분, 최종적으로는 약 35000명분의 무기가 은닉되었다. 좌익 성향의 군인 라우리 쿰풀라이넨이 1945년 봄 오울루에서 발각되면서 사건 전체가 드러났고, 연합국 감독위원회는 6월 3일 핀란드 정부에 사건의 신속한 규명을 요구하는 강경한 서한을 보냈다.
당시 총리는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였고, 공산당이 이끄는 인민민주동맹의 마우노 페칼라와 위르예 레이노 장관도 하인리히스가 사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만네르헤임 대통령도 사임을 권고하면서, 그가 직을 계속하기로 결정하면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인리히스는 만네르헤임에게 사직서를 보냈고, 그때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감독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자위군 조직은 1944년 11월 파시스트 조직이라는 이유로 이미 해체되었고, 무기 은닉에 대해서는 1946년 8월 소급 특별법이 제출되어 1947년 1월 14일 의회에서 118대 68로 통과되었다. 재판은 1947년 3월 28일 총사령부 계열부터 시작되어 1948년 4월 9일에 마무리되었다. 남부 헬싱키의 죄수들은 농담 삼아 '쇠르내이스 총참모부'라 불렸고, 가장 높은 계급에서 구속된 아이로 중장은 2년 8개월 동안 유죄 판결 없이 구금되었다. 최고 재판소는 1950년 3월 15일 698명에 대해 형을 가중했고, 사건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모두 1488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