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라살레

Ferdinand Lassalle
독일 독일 1825–1864 ✕ 결투 중 총상

독일 최초의 노동자 정당 ADAV의 창립자

「철과 같은, 잔혹한 법칙(das eiserne und grausame Gesetz)」 — 임금을 생존 수준에 묶어 둔다며 라살레가 임금철칙에 붙인 이름(1863)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이자 선동가.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를 세워 5년 임기의 회장이 되었고, 보통선거권으로 국가를 움직여 국가 보조 생산협동조합을 세우면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만나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해 마르크스의 깊은 의심을 샀다. 1864년 결혼 문제로 벌인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흘 뒤 제네바 근교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강령은 11년 뒤 고타 통합강령의 뼈대가 되었다.

경력 연표

라살레와 마르크스

라살레와 마르크스의 관계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초기 역사에서 가장 복잡한 긴장 축 가운데 하나였다. 두 사람은 1848년 혁명기 쾰른에서 처음 만났다. 마르크스는 『노이에 라이니셰 차이퉁』의 편집자였고, 라살레는 라인란트에서 혁명 선동가로 활동했다. 엥겔스는 처음부터 라살레의 "경박함, 과시벽, 자만심"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마르크스는 그의 추진력과 지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라살레는 런던에서 궁핍하게 살던 마르크스 부부와 따뜻한 서신을 주고받았고, 1850년 마르크스는 그를 공산주의자동맹에 추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쾰른 위원회는 "라살레의 평판을 고려하여" 입회를 거부했다.

이론적 차이는 185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라살레의 헤라클레이토스 연구(1857)와 비극 『프란츠 폰 지킹엔』(1859)에 대해 마르크스는 사적으로 "박식하지만 독창성이 결여된 희석된 헤겔"이라고 혹평했다. 더 근본적인 대립은 국가관에서 비롯되었다. 헤겔주의자였던 라살레는 국가를 계급 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 발전을 위한 윤리적 제도로 보았다. 그는 보통선거권을 통해 노동자 계급이 국가를 장악하고, 국가 보조 생산협동조합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강조했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국가 소멸을 주장했다.

1863년 라살레가 비스마르크와 비밀 회동을 갖고 노동자-왕정 동맹을 타진한 일은 마르크스에게 배신으로 비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라살레가 프로이센 국가와 타협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독자성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라살레 사후 11년 뒤인 1875년, 고타에서 라살레파(ADAV)와 마르크스파(아이제나흐파)가 통합하여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D, 훗날 SPD)을 결성했다. 그러나 통합 강령은 라살레의 "철의 임금법칙"과 국가주의적 구호를 대거 포함했고, 이에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1875)을 써서 라살레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논박했다. 이 문건은 마르크스 생전에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1891년 엥겔스가 발표한 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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