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데이 페렌츠

Erdei Ferenc

민족농민당을 세운 농촌사회학자로 공산당과 함께한 장관, 1956년 너지 정부의 부총리

머코의 양파 재배 농가 출신 사회학자로 「민중 작가」 운동과 3월 전선에 참여했고 1939년 민족농민당 창당에 함께했다. 1944년 임시정부 내무장관, 1947년 민족농민당 서기장이 되어 당을 공산당 쪽으로 이끌었다. 1949~1953년 농업장관으로 강제 집단화를 집행했고, 너지 임레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냈다. 1956년 혁명 때 부총리로 다당제를 지지했고, 11월 3일 토콜 철군 협상장에서 대표단과 함께 소련군에 체포되었다. 이후 과학아카데미 사무총장을 지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농민당의 동반자에서 1956년 너지 정부의 부총리로

에르데이 페렌츠는 1934년 머코의 농장 지대와 지역 사회를 다룬 책으로 「민중 작가」들의 주목을 받은 농촌사회학자였다. 그는 1939년 민족농민당 창당에 참여했고, 1944년 가을 소련군이 점령한 세게드에서 지하 공산당과 접촉했다. 헝가리어 위키백과는 그가 이때 비밀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공산당 안에서는 그의 비밀 당적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쓴다. 그는 다르바시 요제프와 함께 당의 좌파를 이끌며 소농업자당이 아니라 노동자 정당들과 손잡는 노선을 밀었다.

1949~1953년 농업장관으로서 그는 강제 집단화와 경지 재배치를 집행했고, 그 때문에 농민들의 깊은 미움을 샀다. 1953년 너지 임레가 총리가 되자 법무장관으로 너지의 복권 정책에 동조했다. 1956년 혁명 때 너지는 가까운 벗인 그를 두 번째 정부의 부총리로 남겼다. 너지가 10월 30일 일당제 폐지를 선언하며 발표한 소내각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민족농민당을 페퇴피당으로 다시 세운 너메트 라슬로, 일리에시 줄러 같은 이들은 그가 나라 지도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아서는 안 된다고 항의했다.

다음 개각에서 밀려난 그는 소련과 철군을 협상하는 대표단의 일원이 되었다. 11월 3일 밤 토콜의 소련군 기지에 도착한 대표단은 말레테르 팔 국방장관과 함께 세로프 KGB 의장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몇 주 뒤 카다르 야노시의 개입으로 풀려났다. 이후 실권 있는 자리를 맡지 않고 과학아카데미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1960년대 초 페헤르 러요시와 함께 집단농장 제도를 손보는 데 힘을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