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이에세예비치 마하라제

ფილიპე იესეს ძე მახარაძე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68–1941 ○ 자연사

그루지야를 온건하게 소비에트화하려다 스탈린에게 쫓겨난 볼셰비키 원로

「그루지야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은 외국 점령의 외양을 띠었다, 나라 안에는 혁명에 가담할 준비가 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보고

그루지야 구리아 출신으로 트빌리시 신학교와 바르샤바 수의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해 멘셰비키 우세 지역에서 드문 볼셰비키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반대파에 대한 온건 노선과 그루지야 주권 유지를 주장하다 7월 스탈린에게 해임되고 므디바니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 전사이며, 이후 고스플란·인민위원회·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원로로 1941년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온건 소비에트화 노선과 1922년 '그루지야 사건'

소비에트 권력이 1921년 2-3월 붉은 군대의 군사 작전으로 그루지야에 들어선 뒤, 그루지야 볼셰비키 내부에서는 새 공화국을 어떻게 사회주의적으로 전환할 것인가를 둘러싼 노선 대립이 터져 나왔다. 한쪽은 레닌의 유화적 접근을 실현 가능한 방도로 여긴 온건파였다. 마하라제는 이 온건파의 대표적 인물로, 멘셰비키 반대파에 대한 관용, 당내 민주주의 확대, 점진적 토지개혁, 무엇보다 모스크바로부터의 그루지야 주권 존중을 주장했다. 다른 한쪽은 스탈린과 그루지야 출신의 그리골리 오르조니키제가 이끄는 강경파로, 새로 소비에트화된 공화국들에서 정치적 반대를 제거하고 당 통제를 중앙집권화하려 했다.

1921년 7월 스탈린은 트빌리시에서 지역 민족주의를 제거하겠다는 강령을 연설했다가 청중에게 야유를 받았고, 며칠 뒤 혁명위원회 의장 마하라제를 '충분히 단호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해임해 폴리카르프 므디바니로 교체하면서 지역 지도자들에게 '민족주의라는 히드라를 분쇄하라'고 명령했다. 마하라제를 지지했던 그루지야 체카 수장 코테 친차제 등도 함께 해임되고 베리아 등 더 강경한 인물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스탈린은 므디바니와도 정면으로 충돌했다. 핵심 쟁점은 그루지야가 소비에트 공화국 연합 안에서 가질 지위였다. 오르조니키제는 1921년 말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를 하나로 묶은 자캅카스 연방을 만들어 이 연방이 단일 연방 공화국으로 소련에 가입하자고 밀어붙였고, 그루지야 지도부는 자기 공화국이 연방의 일원으로서 온전한 가입국 지위를 얻기를 요구하며 이에 반대했다. 1922년 마하라제는 소련 구성 안에서 그루지야의 자치 유지를 주장했고, 멘셰비키 정부 시절 러시아연방이 그루지야와 맺은 협정을 그루지야 공산주의자들과 상의 없이 체결한 일에서 드러나듯 모스크바의 결정 방식에 대한 불만도 쌓여 있었다.

마하라제는 이 갈등의 한 축이었지만, 같은 문서에서 그는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지도자로, 강경 노선의 대표자로도 각각 지목된다. 어느 쪽 규정이 그루지야 내부의 실제 역관계를 더 정확히 반영하는지는 이 문서들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이 다툼이 곧바로 당내 권력 투쟁으로 번졌고, 레닌의 지원을 얻으려 한 그루지야 지도부가 패배로 끝났다는 점은 확인된다. 정보 지연 속에서 레닌은 1922년 11월 말 제르진스키를 트빌리시에 파견해 조사하게 했으나, 제르진스키는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 편에 서서 완화된 보고서를 올렸다. 12월 말 레닌은 오르조니키제와 스탈린 모두에게 대러시아 민족주의를 강요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1923년 1월 25일 정치국 결정은 므디바니와 그 측근들을 요직에서 제거함으로써 강경 노선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1923년 3월 6일 마하라제와 므디바니에게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계략'에 맞선 강력한 지지를 표한다는 레닌 명의의 전보가 전해졌지만, 그 작성·진정성을 두고는 사료마다 견해가 갈린다.

이 충돌이 남긴 결과는 그루지야에 그치지 않았다. 무장 봉기가 일어나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희생되고, 이후의 탄압이 이어졌다. 그루지야 원로 볼셰비키들의 진로도 크게 꺾였다. 1920년대 말부터 이들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되어 므디바니를 비롯한 대부분은 1930년대 대숙청 과정에서 처형되었다. 마하라제는 이 운명을 피해 살아남았고, 스탈린에게 밀려난 뒤에도 자캅카스 고스플란 의장(1924년부터), 그루지야 인민위원회 의장(1929-1930), 그루지야 중앙집행위원회 의장(1931-1938)을 거쳐 1938년 그루지야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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