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묜 그리고리예비치 피린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Фирин
소련 리투아니아 1898–1937 ✕ 처형

개조’ 선전을 만든 드미트라크 수용소장

1937년 4월 30일, 피린이 연출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 축제 — 깃발과 오케스트라, 죄수들이 그린 지도자 초상화로 빛났다. 한 달 뒤인 5월 28일 체포, 그해 8월 총살.

적군 정보장교 출신의 굴라크 수용소장. 1932년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을 거쳐 드미트라크(Dmitlag)를 이끌며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총괄했다. 죄수 노동을 '개조'라는 이름의 선전으로 포장해 캠프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막심 고리키, 아베르바흐와 함께 찬양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생산성이 낮은 죄수의 배급을 깎는 한편 '개조'를 설파한 모순적 인물. 야고다 측근으로 1937년 체포되어 총살됐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혁명과 첩보: 굴라크 이전의 경력

피린은 본명 세묜 푸프코로 1898년 빌나(현 빌뉴스)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비텝스크의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징집되었으나 탈영했고, 1917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혁명적 사건에 가담했다. 재차 징집되었다 다시 탈영한 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내전기에는 리투아니아에서 파르티잔 사보타주 부대를 지휘했고, 이후 서부전선 사령부 정보부로 배속되어 적 후방의 유격·교란 부대 조직을 담당했다. 독일 스파르타쿠스단 여단의 정치위원(코미사르)도 역임했다. 내전 종결 후 수년간 그리스, 터키,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에서 적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하는 등 해외 첩보 경력을 쌓았다. 1930년 OGPU 특별부 부장으로 발탁되어 국내 보안기관으로 전환했고, 이로부터 2년 뒤 굴라크 수용소장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경력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그의 초기 이력은 여러 면에서 굴라크 시절과 대조를 이룬다. 제정 러시아 군대에서 두 번이나 탈영했던 청년 혁명가가 15년 뒤에는 죄수들의 탈주를 막고 사망률이 치솟는 수용소의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국제 혁명을 위해 유럽 각지를 누볐던 정보장교는 막심 고리키와 함께 강제노동을 미화하는 책을 편집했다. 고리키는 피린을 두고 “그는 사람을 설득하는 법을 안다”고 평했으나, 피린이 설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독자들이 아니라 굶주림과 혹사로 죽어가던 죄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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