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와 군부 사이에서 권력을 전환한 쿠바 지배자
1959년 1월 1일, 반군이 수도로 진격하자 바티스타는 대통령직을 버리고 쿠바를 떠났다.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가난한 농촌 출신의 군인·정치가로, 1933년 하사관 반란 뒤 쿠바 정치를 좌우했다. 1940년에는 새 헌법 아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회개혁과 연합국 지원을 추진했지만, 1952년 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쿠데타로 권력을 되찾았다. 그의 두 번째 통치는 헌정과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미국 자본 및 하바나의 조직범죄와 결탁한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며, 불평등과 탄압은 무장 저항을 키웠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축출된 그의 망명은 이후 미·쿠바 대립이 심화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0–1959 정부·행정 · 쿠바
경력 연표
- 1921쿠바 육군 사병
- 1923–1933농촌경비대 속기사 하사
- 1933–1940쿠바 육군 참모총장, 실권자
- 1940–1944쿠바 헌정 대통령
- 1948–1952쿠바 상원의원
- 1952–1959쿠바 대통령, 군사독재자
- 1959–1973망명 생활, 포르투갈·스페인
관련 역사 사건
공산주의 활동 진압국과 국가 폭력
1950년대 창설된 공산주의 활동 진압국(BRAC)은 바티스타 두 번째 정권의 가장 날카로운 도구가 되었다. 언론 검열을 강화하는 한편 이 기구는 대규모 폭력과 고문, 공개 처형을 자행했다. 실상 그 진압망은 공산주의자만을 겨냥하지 않았다. 정보를 캐내려는 목적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고문당했고, 반군에 합류하려는 이들에게 경고를 보내려는 목적으로 청년을 포함한 용의자들이 공개 처형되었으며, 훼손된 시신이 가로등에 매달리거나 거리에 버려졌다. 미국이 제공한 비행기와 함정, 탱크, 네이팜을 정부는 반란 진압에 사용했으나 1958년 3월 미국은 무기 판매를 중단했고 곧 무기 금수 조치를 내렸다. 진압은 소요를 잠재우지 못하고 오히려 저항을 넓혔다. 1958년 변호사·건축가·치과의사·회계사·사회복지사 단체를 비롯한 45개 조직이 7·26 운동을 지지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했다. 정권 아래 희생자 규모는 논쟁적이다. 역사학자들과 1차 사료는 희생자를 수백 명에서 2만 명 사이로 추산하며, 최고 수치는 여러 역사학자가 반박하고 일부는 선전으로 본다. 프랑스 역사학자 잔닌 베르데스루루는 전문가들이 '2천 명을 최대치'로 본다고 서술했고, 카스트로 자신은 당 대회 보고에서 피해자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