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소프 자신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선언했다」: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에서 인용
러일전쟁기의 제독이자 모스크바 총독으로,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 척의 기뢰정을 이끌고 터키 장갑함을 격침해 전역 첫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해군 장교였다. 1905년 11월 모스크바 총독에 임명되어 12월 무장봉기를 바리케이드 포격과 세묘놉스키 근위연대 투입으로 진압했으며, 레닌이 인용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사회혁명당의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부상으로 휴유증을 앓다 1912년 사망했다.
1906년 7월 암살 시도 직후 두바소프는 모스크바 총독직에서 형식적으로 해임되었고, 6개월 뒤인 12월 6일에는 해군 대장으로 진급하여 국가평의회 의원 신분을 유지했다. 이전에 임명된 국가평의회 의원직(1906년 1월)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정치적으로 그는 국가평의회에서 '우익 그룹'에 속했으며, 재정위원회에서 함대 육성과 국방력 강화 문제를 다루었다. 1908년 12월에는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을 받았다.
군사·정책 부문에서 그는 국가평의회와 국가방위평의회를 통해 함선 건조 프로그램의 '주요 원칙'을 정하는 회의와 신형 전함 설계 검토에 참여했다. 표트르 스톨리핀 및 해군 장관 이반 디코프와 같은 인물들이 추진한 재무장 논의에 관여한 것이다. 1907년 8월에는 크론시타트에서 무르만 해안까지 항해하며 항만 건설의 타당성을 직접 조사했다.
역사 기록 부문에서 그는 러일전쟁 시기 함대 활동 자료를 수집·연구하는 역사위원회의 발족을 주도한 사람 중 하나였다. 1909년에는 1898년에 작성한 뤼순항 점령 관련 소견서 사본을, 1910년에는 태평양함대 사령관 시절 해군부·예하 기함장·함장·극동 외교관과 주고받은 문서철을 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문서철은 다른 자료와 함께 1912년 위원회에서 출간되었다. 정부가 뤼순항을 함대 기지로 택한 데 반대하고 모잠포 만을 선호했던 그의 1898년 판단이 이 자료를 통해 사후에 기록으로 남게 된 셈이다.
말년에는 암살 시도의 부상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차 해외에 장기 체류한 뒤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1912년 7월 자신의 67세 생일을 사흘 앞두고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으며, 사망 원인은 1906년과 1907년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병사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생전 마지막 대규모 사업은 뤼순과 쓰시마에서 전사한 해군 장병을 기리는 페테르부르크의 '물 위의 구세주' 성당 건립에 적극 참여한 일이었다. 1차 세계대전 중 발트함대를 위해 노비크급 구축함 '중위 두바소프'가 푸틸로프 조선소에서 착공되었으나 1917년의 사변으로 완성되지 못했고, 현재 그의 무덤도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