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르 티무로비치 가이다르

Егор Тимурович Гайдар
소련 러시아 1956–2009 ○ 심장발작으로 사망

충격요법의 설계자: 계획경제를 해체하고 러시아 자본주의의 초석을 놓은 경제학자

1993년 10월 3일 밤 TV 생방송: "이 시간에 경찰과 보안군에만 의존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모스크바 시민 여러분, 모소베트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섰다.

소련 작가 아르카디 가이다르와 파벨 바조프의 손자. 모스크바국립대 졸업 후 《콤무니스트》와 《프라우다》 경제편집자로 시장개혁을 주장했다. 1991년 11월 옐친 정부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으로 들어가 1992년 1월 2일 가격자유화와 민영화를 단행,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는 충격요법을 설계했다. 1992년 6~12월 총리 대행, 1993년 헌정위기 때 TV로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설 것을 호소했다. 기근과 국가 붕괴를 막았다는 평가와 국민 저축을 쓸어갔다는 비판이 교차하는,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정책 유산을 남겼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소비에트 문학 귀족의 손자, 체제의 심장에서 자란 이단

예고르 가이다르의 성은 소련의 모든 어린이가 알았다. 할아버지 아르카디 가이다르는 내전의 소년 지휘관 출신으로 「티무르와 그의 부대」를 쓴 국민 아동문학가였고, 외할아버지 파벨 바조프는 우랄 설화집 「말라카이트 상자」의 작가였다. 1956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종군기자인 아버지를 따라 유년기를 쿠바와 유고슬라비아에서 보냈다. 혁명 신화의 한복판에서 자라며, 동시에 사회주의의 다른 실험들을 눈으로 본 소년이었다.

모스크바대학 경제학부에서 그는 우등생의 길을 걸으면서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의 개혁 경제학, 그리고 금서였던 서방 경제학을 파고들었다. 계획경제의 성채인 당 이론지 《콤무니스트》의 경제 편집자가 되어서는, 검열의 경계선 위에서 보조금과 적자와 화폐 과잉의 실상을 폭로하는 글을 실었다.

체제의 성골로 태어나 체제 경제의 파산을 가장 정확히 계산한 사람. 이 역설이 1991년 가을, 서른다섯의 그를 폐허가 된 경제의 집도의 자리로 밀어 올리게 된다.

개혁팀의 형성: 레닌그라드-모스크바 세미나 (1983~1991)

가이다르는 1983년 아나톨리 추바이스를 만나면서 운명적인 협력 관계를 시작했다. 추바이스는 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비공식 경제학자 그룹의 리더였으며, 사회주의 경제의 시장적 개혁 가능성을 토론하는 세미나를 운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개혁적 경제학자들을 연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4년부터 가이다르와 추바이스 그룹은 정치국 산하 '국민경제 관리 개선 위원회'를 위한 문서 작성에 참여했다. 이 위원회는 고르바초프가 이끄는 젊은 정치국 세대가 추진한 온건한 경제 변화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기구였다. 당시 모델은 1968년 헝가리 경제 개혁이었다. 비록 위원회의 제안은 최종적으로 거부되었지만, 가이다르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함께 일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제안을 국가 상황에 맞게 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의 팀이 형성되었다."

1986년 레닌그라드 근교 판시온 '즈메이나야 고르카'에서 열린 경제 세미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이 자리에서 가이다르와 추바이스를 포함한 일부 참가자들은 본회의와 별도로 모여 본격적인 시장 개혁을 논의했다. 소련의 재정 위기 심화, 은행 시스템 개혁, 재산권 보장 등이 의제였다. 유사한 세미나는 1987년과 1988년에도 이어졌고, 1988년 모임에서는 처음으로 소련의 불가피한 붕괴라는 생각이 명시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세미나들에서 표트르 아벤, 올레그 아나닌, 뱌체슬라프 시로닌 등 훗날 정부에 합류할 핵심 인물들이 결집했다.

1990년 7월 헝가리 쇼프론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는 분수령이었다. 한쪽에는 노드하우스와 도른부시 같은 서방의 저명 경제학자들이, 다른 쪽에는 가이다르, 추바이스, 아벤 등 러시아 개혁팀 거의 전원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충격요법, 가격 자유화, 재정 안정화, 초인플레이션 방지를 위한 지출 삭감 등 급진 개혁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참석자 예브게니 야신은 "그때 이미 우리 자신의 탐구에서 더듬어 찾던 길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완전해졌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의심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표트르 아벤은 가이다르의 리더십을 이렇게 평했다: "교육 배경, 리더가 되려는 열망, 개인적 자질 모든 면에서 가이다르는 처음부터 이 팀 전체의 리더였다. ... 우리는 각자 자기 학문이 있었고 그 외에 개혁이 있었는데, 가이다르에게는 이 개혁 외에 자기 학문이라는 게 없었다. 그는 개혁이라는 관념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1992년의 겨울, 집도의의 대가

1991년 가을 옐친은 무명에 가까운 이 경제학자에게 정부의 경제 전권을 맡겼다. 국고는 비었고 곡물 수매는 무너졌으며, 가이다르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대도시의 식량 재고는 몇 주 단위로 계산되고 있었다. 1992년 1월 2일 가격 자유화가 단행되었다. 진열대는 몇 주 만에 채워졌지만 물가는 한 해 동안 스물다섯 배가 되었고, 국민의 예금은 증발했다. 6월 총리 대행이 되었으나 12월 인민대표대회는 그의 인준을 거부했고, 옐친은 체르노미르딘을 대신 세웠다.

이후 그는 짧은 복귀(1993년 제1부총리)와 의원 생활을 거쳐 자신이 세운 이행기경제연구소로 물러났고, 2006년에는 소련 붕괴의 재정적 해부인 「제국의 소멸」을 썼다. 2009년 53세로 갑자기 죽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하게 갈린다. 기근과 내전을 막은 용기 있는 집도의였다는 옹호와, 수천만 명을 빈곤으로 밀어 넣은 교조적 실험이었다는 비판이 맞선다. 본인의 답은 한결같았다. 대안은 이미 1991년에 소진되어 있었다는 것, 자신이 한 일은 선택이 아니라 응급처치였다는 것이다.

연구자로 돌아가다: 연구소, 저작, 그리고 조용한 영향력 (1994~2009)

1994년 정부를 떠난 가이다르는 자신이 1990년에 설립한 이행기경제연구소(현 예고르 가이다르 경제정책연구소)로 돌아가 평생 소장직을 지켰다. 이 연구소는 단순한 싱크탱크가 아니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 러시아 정부가 추진한 주요 경제 개혁들, 즉 조세법전, 예산법전, 안정화기금 법안의 초안 대부분이 이곳에서 나왔다. 가이다르 자신은 두마 의원으로서(1993~1995, 1999~2003) 예산·조세위원회에서 이 법안들의 입법을 직접 주도했다. 미하일 카시야노프 총리(2000~2004) 시절에는 공식 직함 없이도 거의 모든 주요 경제 결정에 자문했으며, 알렉세이 쿠드린 재무장관과 미하일 자도르노프 전 재무장관은 가이다르가 죽는 날까지 정부의 경제 정책 결정에 관여했다고 증언했다.

가이다르의 집필 활동은 개혁가에서 역사가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1994년 『국가와 진화』는 소비에트 체제의 몰락을 권력과 소유의 분리라는 프리즘으로 해부하며, 노멘클라투라가 소유권을 획득하는 대가로 정치권력을 포기하는 것이 평화적 체제 전환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1997년 『경제성장의 이상현상』은 사회주의 경제가 석유 수출에 의존해 인위적 성장을 연장하다 붕괴한 과정을 추적했다. 2005년 『긴 시간』은 러시아 경제사를 세계사적 맥락에서 조망한 역작이었고, 2006년 『제국의 소멸』은 소련 붕괴의 재정적·구조적 원인을 냉정하게 해부한 국제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가이다르의 핵심 논지는 일관되었다. 소련은 곡물을 수입하기 위해 석유를 팔아야 했고, 유가가 폭락하자 제국도 무너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가 동일한 자원 의존의 함정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그는 경고했다.

2003년 의회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공개적으로 비판적 목소리를 냈다. 유코스 사건을 "오래간만에 나온, 러시아 경제성장을 멈추게 하는 가장 강력한 한 수"라고 규탄했고, 2008년에는 안정화기금을 푸는 정책을 공개 반대했다. 2006년 더블린에서 자신의 책을 발표하던 중 의문의 급성 중독 증세로 쓰러졌고,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2009년 12월 53세로 사망했다. 그가 설립하고 키운 연구소는 오늘날 러시아의 대표적 경제정책 연구기관으로, 그의 저작들은 러시아 자유주의 개혁파의 표준적 참조점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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