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을 지지한 붉은 군대 정치수장, 숙청이 닥치자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다
매년 키예프에서 아버지가 낡은 가죽 장화를 청하러 왔지만, 가마르니크는 끝내 거절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 장화를 보면, 아들이 군대에서 도둑질한다고 생각할 게 아닙니까."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이끌고 극동 지역의 산업화를 진두지휘한 혁명가. 1929년부터 8년간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서 소련군 정치장교 체계를 구축하고 이끌었으며, 투하쳅스키의 기계화·항공 중심 군 현대화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했다. 1929년 중앙위원회에서 부하린 '우익 반대파' 숙청을 공개 지지했으나, 1937년 5월 자신이 '군사-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해임되자 체포를 기다리지 않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55년 복권.
경력 연표
- 1916RSDLP(b) 입당, 키예프 아르세날 공장 선전 활동
- 1917–1918키예프 볼셰비키 위원장; 1월 봉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9–1920오데사 현당위원장; 제12군 남부집단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1923키예프 현 혁명위원회 위원장 겸 현 집행위원회 위원장
- 1923–1928극동혁명위원회 위원장; 극동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28–1929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9–1937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국방인민위원 제1부위원
- 19375월 30일 해임 통보, 다음날 권총 자살
관련 역사 사건
1929년, 붉은군대 정치총국의 수장
얀 가마르니크는 지토미르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지하활동과 정치위원 사업으로 단련된 세대의 전형이었다. 내전 후 그는 극동으로 보내져 달네보스토치니 지방당을 이끌며 이 광대한 변경의 소비에트화와 개발을 지휘했고, 이어 벨로루시야 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29년 그는 붉은군대 정치총국(PUR)의 수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부터 국방인민위원 제1부위원과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을 겸했다. 정치총국은 군의 당 조직과 정치교육, 간부 정책을 관장하는 기구였고, 가마르니크는 이 자리에서 8년 동안 군의 정치 사업과 군사 전문성의 결합을 관리했다. 그는 투하쳅스키, 우보레비치, 야키르 등과 함께 기계화와 항공, 간부 양성을 축으로 한 군 현대화를 뒷받침했으며, 극동 근무의 경험을 살려 특별극동군의 증강과 극동 개발 사업에도 깊이 관여했다.
1930년대 중반의 붉은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현대화되는 군대 가운데 하나였고, 그 정치적 골간을 관리한 것이 가마르니크였다. 군과 당을 잇는 바로 그 위치가, 군 지휘부에 대한 의심이 폭발한 1937년에 그를 가장 위험한 자리에 세우게 된다.
1937년 5월 31일, 마지막 아침
1937년 5월 말, 투하쳅스키 사건이 군 수뇌부를 삼키고 있었다. 투하쳅스키, 야키르, 우보레비치가 잇따라 체포되었고, 이들과 오랜 세월 함께 일해 온 가마르니크의 처지는 하루가 다르게 좁아졌다. 5월 30일 그는 국방인민위원 부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5월 31일 아침, 군 간부들이 병으로 누워 있던 그의 아파트를 찾아와 군사평의회 위원직 해임을 통보했다. 그들이 떠난 직후 가마르니크는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체포와 심문, 그리고 조작된 자백 대신 그가 택한 길이었다.
다음 날 『프라우다』는 그가 「반소비에트 분자들과 얽혀 자멸했다」고 보도했다. 6월 11일 투하쳅스키와 일곱 명의 지휘관이 비공개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고, 가마르니크는 사후에 「군사-파시스트 음모」의 일원으로 낙인찍혔다. 탄압은 가족에게로 이어져 아내 블류마는 1938년 총살되었고 어린 딸은 보육원과 수용소를 거쳐야 했다.
가마르니크는 1955년 복권되었다. 문서고에 기초한 연구는 「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 전체가 고문으로 짜낸 자백 위에 세워진 조작이었으며 실재하는 음모는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숙청이 붉은군대의 지휘부와 정치 간부단에 남긴 손실은 1941년의 재난에서 혹독한 값을 치렀고, 가마르니크의 마지막 아침은 그 손실의 서두에 놓인 장면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