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부흥을 설계하고 미군을 40배로 키운, 육군·국무·국방 3직을 모두 지낸 유일한 미국인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마셜은 1947년 6월 5일, 준비된 원고도 없이 1,200단어의 연설을 통해 '굶주림, 빈곤, 절망, 혼란에 반대하는' 유럽 원조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마셜은 육군참모총장(1939~45)·국무장관(1947~49)·국방장관(1950~51)을 두루 지낸 유일한 미국인으로, 처칠이 '승리의 조직자'라 부른 연합군 팽창의 총설계자였다.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연설에서 전후 유럽의 경제 붕괴와 소련 팽창에 맞선 대규모 원조 구상을 제안했고, 이 '마셜 플랜'은 4년간 130억 달러로 서유럽 산업 기반과 통화를 안정시키며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의 틀을 재편했다. 국무장관 시절 이스라엘 승인을 두고 트루먼과 정면 충돌했으며, 국방장관으로 복귀해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을 승인함으로써 민간의 군대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군인 출신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9–1945 군사·지휘 · 미국 국가기관
경력 연표
- 1880펜실베이니아주 유니언타운에서 석탄·코크스 사업가의 막내로 출생
- 1902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육군 소위 임관 후 필리핀 배치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제1사단 작전참모로 칸티니·뫼즈-아르곤 공세 기획
- 1939–1945육군참모총장, 미군을 18만9천에서 800만으로 팽창시키고 연합군 전략 총괄
- 1945.12–1947.01중국 특사, 국민당-공산당 연립정부 중재 실패
- 1947–1949국무장관, 마셜 플랜 제안 및 NATO 창설 추진
- 1950–1951국방장관,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 및 군부 재건
- 1953노벨평화상 수상
관련 역사 사건
- 1914–19181차 세계대전제1사단 작전참모제1사단 작전참모로 칸티니·뫼즈-아르곤 공세를 기획했다.
- 1941–1944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미 육군 참모총장오버로드 지휘관 후보였으나 워싱턴에서 참모총장으로 남아 작전 준비를 뒷받침했다.
- 1947–1948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마셜 플랜의 설계자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연설에서 유럽 재건을 위한 대규모 원조 계획을 제안했고, 이 구상은 이후 $130억 규모의 유럽부흥계획으로 실현되었다.
- 1945–1949국공내전미국의 중재 특사1945년 12월~1947년 1월 연립정부 수립을 중재하다 실패를 선언했다.
- 1950–1953한국전쟁맥아더 해임 승인국방장관으로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을 승인했다.
중국 특사와 '중국 상실' 공방
1945년 12월, 육군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난 지 몇 주 만에 마셜은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임무는 국민당의 장제스와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 사이에서 연립정부를 성사시켜 내전의 재발을 막는 것이었다. 미국은 국민당에 결정적이었던 원조를 지렛대로 삼았지만, 공산당에 대해서는 실질적 압박 수단이 없었다. 그는 1945년 12월 20일 중국에 도착해 양측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였고, 교전 중지와 군대 통합을 둘러싼 회담은 1년 넘게 이어졌으나 실질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양측은 회담을 다음 결전을 준비할 시간으로 활용했다.
중재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1946년 7월 29일부터 국민당에 대한 무기·탄약 판매를 중단했는데, 이 조치는 미국 국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46~47년 무렵 마셜은 건강 악화와 국내의 비판, 다른 대외정책 과제 때문에 중국을 떠났고 1947년 초 특사단도 철수했다. 그의 중재 실패는 중국 내전의 전면 재개로 이어졌고, 1949년 공산당이 승리했다. 국무장관으로서 마셜은 장제스의 승리가 미국의 핵심 이익이라는 국무부·국방부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미군이 직접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실패한 임무는 훗날 반공 진영의 정치 공세에 이용되었다. 1951년 6월, 한국전쟁 중 해임된 더글러스 맥아더는 마셜의 대중국 사절 활동을 '미국 외교사상 최대의 실책'이라고 규정했고, 매카시 상원의원은 그를 '중국 상실'의 책임자로 몰아갔다. 매카시는 그가 임무 수행 중 국민당에 대한 무기 공급을 봉쇄하고 만주로 통하는 장자커우 산길을 열어 공산당에 유리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 공세는 한국전쟁 교착과 함께 마셜의 명예를 둘러싼 미국 내 여론을 당파적으로 갈라놓았다. 1952년 대선에서 아이젠하워는 트루먼 행정부의 중국·한국 정책 실패를 비판하면서 마셜의 노선을 변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