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Γεώργιος Παπανδρέου

해방과 내전의 경계에 선 자유주의 정치가

카세르타 협정에서 그는 해방 뒤에도 영국군 사령관 스코비에게 군사 지휘권을 맡기는 구상에 동의했다.

그리스의 자유주의 정치가로, 군주제에 반대하면서도 공산주의 운동과는 대립한 사회개혁 지향의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정부를 이끌며 레바논 회의와 카세르타 협정을 통해 저항 세력의 정부 참여와 군 통합의 틀을 마련했다. 1944년 귀국 뒤 국민통합정부의 수상으로 국가 통치권을 세우려 했지만, 영국의 군사적 개입과 EAM·비EAM 세력의 충돌 속에서 그 구상은 데켐브리아나와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후 중앙연합을 창당해 민주주의를 옹호했으며 1967년 군사 쿠데타 뒤 가택연금 중 사망했다.

다른 이름: 조지 파판드레우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중앙연합 창당과 1961~1965년의 대결

1961년 9월 19일, 총선을 앞둔 시점에 자유당계와 사회민주주의 계열, 기존 우파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파판드레우를 중심으로 중앙연합을 결성했다. 목표는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의 민족급진연합(ERE)에 맞설 대안 세력이 되는 것이었다. 10월 선거는 ERE의 승리로 끝났지만 부정선거와 좌파·중도계에 대한 경찰·군부의 광범위한 탄압이 뒤따랐고, 파판드레우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카라만리스의 '불법 정부'를 축출하라는 '불굴의 투쟁'을 선언했다.

1963년 선거에서 중앙연합이 제1당이 되었으나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다. 파판드레우는 총리로 지명되어 의회 신임을 얻었지만, 좌파 민주연합(EDA)의 지지에 기대어 통치하지 않겠다며 사임했고, 파울 왕은 의회를 해산해 새 선거를 불렀다. 1964년 선거에서 중앙연합은 53퍼센트의 득표와 절대 과반을 얻었다. 정권을 잡은 파판드레우는 경제 자유화와 소득 재분배, 의무교육 연한 연장과 전 단계 무상교육, 학교와 복지 확대 같은 사회 개혁을 밀어붙였다. 대외적으로는 키프로스의 에노시스(그리스 병합)를 지지했고, 키프로스 충돌 속에 그리스군 사단을 섬에 파견했다. 이 과정에서 아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당내 좌파의 지도자로 부상했고, 그가 결성한 '민주동맹' 조직망을 둘러싼 논란도 커졌다.

군주제와의 충돌은 1965년 군 내부의 비밀 조직 아스피다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 국방장관 페트로스 가루팔리아스가 사임하자 파판드레우는 아들의 조언에 따라 국방장관직을 겸해 군 통제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콘스탄티노스 2세 왕은 아들이 연루된 사건을 아버지가 수사하게 될 이해 충돌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파판드레우는 사임했고, 왕은 곧바로 게오르기오스 아타나시아디스노바스를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 파판드레우는 '왕은 군림하되 국민이 통치한다'는 구호로 여론에 호소했고, 왕이 중앙연합 출신 이탈자들로 꾸린 연립 정부들은 신임 투표를 얻지 못해 잇달아 무너졌다. 파판드레우는 이들을 '배신자'라 규정하고 두 번째 '투쟁'을 선언했다. 이 1965년 7월 사태는 2년에 걸친 정치 불안정으로 이어졌고, 1967년 선거를 앞두고 중앙연합이 사회주의 성향의 EDA와 연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서 1967년 4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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