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국제주의에서 전시 애국주의로 선회한 논객
1917년 7월, 그는 《Живое слово》에 레닌의 독일 간첩설 자료를 실었다.
그리고리 알렉신스키는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가이자 제2국가두마 의원으로 부상했지만, 전쟁과 혁명의 압박 속에서 사회애국주의로 급선회했다. 1917년 그는 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에 합류해 볼셰비키를 공격했고, 7월에는 에르몰렌코의 불충분한 증언을 레닌이 독일 간첩이라는 주장으로 포장해 대중 언론에 올렸다. 이 폭로는 군대와 소비에트 안에서 반볼셰비키 정치를 강화했지만, 그가 혁명가에서 반볼셰비키 망명자로 바뀐 경로도 드러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99–1904모스크바대학교 학생, 학생운동 참가
- 1905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선동가
- 1905–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 볼셰비키 출판물 필자
- 1907제2국가두마 의원, 사회민주파 볼셰비키계 연설자
- 1909–1914좌익 볼셰비키계 《전진》 그룹 지도자
- 1914–1917전쟁 지지 사회민주주의자, 파리 《호소》 공동 편집자
- 1917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 지도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으로 선출
- 1919–1967러시아 망명 정치가·논객, 파리 러시아 평의회 의장
관련 역사 사건
망명과 반소 활동(1919~1967)
1919년 알렉신스키는 에스토니아로 넘어갔고,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러시아 평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20년에는 '전술센터' 사건으로 최고혁명재판소의 궐석 재판을 받아 반혁명 음모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소비에트 러시아 입국권을 박탈당했다. 이후 파리에 정착해 러시아 평의회 의장을 맡았고, 《공동사업》과 《러시아 신문》 등 망명 언론에 기고하며 논객으로 활동했다. 저술도 계속해 《차르제에서 공산주의로》(1923), 《한 실험의 결산: 공산주의 체제 25년》(1941) 같은 책을 냈다.
말년에 그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자료를 컬럼비아대학교 바흐메테프 기록보관소에 넘겼고, 일부 문서는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1967년 파리 근교에서 사망해 생트주네비에브드부아 묘지에 안장되었다. 1918년 체카에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나 소비에트 기관에 취직하기까지 했던 인물이, 1년 만에 국외로 빠져나가 소비에트 권력과 정면으로 맞서는 망명 정치가로 남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