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재 부문 주도 성장 모형을 최초로 정식화한 고스플란의 수학적 경제학자
1929년 산업화 속도 논쟁의 정점에서 펠트만은 "나라의 산업화 템포는 소부르주아적 저항에 의해 제한될 수 없으며, 한계는 오직 모든 노동자의 육체적·심리적 지구력 한계까지 긴장시킨 물질적 가능성뿐"이라고 선언했다.
전기공학자 출신으로 1928년 경제학 사상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을 정식화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자본재·소비재 2부문 모형은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되었으나, 1931년 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에서 축출되었다. 1950년대 미국 경제학자 에브시 도마르가 그의 업적을 재발견하면서 펠트만-마할라노비스 모형으로 알려져 인도 경제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경력 연표
- 1912–1922전기공학자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근무, 국민경제최고회의 전기부문에서 GOELRO 전력화 계획 수립에 참여
- 1923–1927크르지자놉스키의 초청으로 고스플란 세계경제정세부에서 근무, 『계획경제』지에 해외 경제정세 분석 발표
- 1928고스플란 장기계획부장으로서 2부문 성장 모형을 발표 — 경제학史上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
- 1929–1930「분석적 계획 수립 방법」 발표, 펠트만 모형이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
- 1931–1934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을 떠나 계획아카데미 기술구축학부장 및 교원으로 근무
- 1935–1937북극해항로총국(GUSMP) 종합계획반장
- 1937–1953탄압을 겪은 후 여러 도시에서 공학직으로 근무, 시추 관련 발명특허 획득
- 1953–1958중병을 앓으며 모스크바 귀환, 경제학 연구에서 물러나고 사후 복권
관련 역사 사건
펠트만 성장 모형: 구조, 논쟁, 그리고 세계적 유산
펠트만은 1928년 「계획경제」지에 발표한 두 편의 논문 「국민소득 성장률 이론에 관하여」에서 경제학 역사상 최초의 형식적 거시경제 성장 모형을 정식화했다. 마르크스의 재생산 표식을 2부문으로 재구성하여, 경제 전체를 자본재 생산 부문(K)과 소비재 생산 부문(C)으로 나누고 각 부문에 고유한 자본계수를 부여했다. 모형의 핵심 변수는 총투자 중 자본재 부문에 배분되는 비율 λₖ였으며, 이 비율이 높을수록 단기 소비 증가는 억제되지만 장기적으로 더 높은 성장률과 소비 수준을 달성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 모형은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되었고, 펠트만의 최소 성장 시나리오는 1940년乃至 1950년까지의 실제 국민소득 성장률과 놀라울 정도로 근접했다. 그러나 1930–31년 논쟁에서 그의 예측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인더스트리化를 위하여」 같은 당 기관지에서 경향적 공격이 이어지며 결국 고스플란에서 축출되었다.
1950년대 미국 경제학자 에브시 도마르는 해러드-도마 모형의 공동 창시자로서 소련의 1920년대 계획 문헌을 조사하던 중 펠트만의 논문을 발견하고, "소련의 성장 모형은 레온티예프의 연구를 제외하면 서구의 유사한 시도보다 훨씬 정교하다"고 평가했다. 도마르의 1957년 저서 『경제성장 이론 에세이』를 통해 서구에 소개된 펠트만 모형은, 인도 통계학자 프라산타 찬드라 마할라노비스가 1953년 독자적으로 개발한 유사 모형과 결합되어 '펠트만-마할라노비스 모형'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할라노비스는 이를 인도 제2차 5개년 계획(1956–61)의 이론적 토대로 삼았고, 이로써 1920년대 소비에트 계획 논쟁의 산물은 냉전기 제3세계 발전경제학의 핵심 도구로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