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리 페트로비치 하르첸코

Григорий Петрович Хар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36–

숨가이트의 참상을 목격한 조직당사업부 부장, "우리는 하루 늦었다"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세 시간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루 늦었다! 하루 종일 군대 파견 결정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소련 철도 기술자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1987~1988)을 지냈다. 1988년 2월 28일 밤 KGB 부의장 필리프 봅코프와 함께 숨가이트에 도착, 사흘간의 포그롬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중앙의 대응이 '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늦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1988~1990)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1990~1991)을 지냈으며,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상품생산자연합 부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숨가이트 파견과 중앙의 대응

하르첸코는 1988년 초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아르메니아 편입을 요구하며 벌인 시위에 대응하기 위해 파견된 중앙위 대표단의 하급 간부였다. 그는 1988년과 1989년 대부분을 캅카스에서 보냈으며, 스테파나케르트 집회에서 법적 절차와 중앙의 심의를 강조했지만 시위대의 “미아춤(통일)” 구호를 돌려세우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는 모스크바가 제도적 절차로 대중운동을 다루려 한 접근과 현장의 요구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1988년 2월 28일 저녁, 하르첸코와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부위원장 필리프 봅코프는 바쿠에서 숨가이트로 간 최초의 소련 중앙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불탄 무궤도전차와 자동차, 여전히 거리를 배회하는 폭도들을 보았다. 하르첸코는 학살 피해자의 훼손된 시신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으며, 사진은 나중에 폐기했다고 말했다. 그와 봅코프는 질서 회복을 위해 군 투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내무부 병력과 바쿠 군사학교 생도들이 도착하기까지 몇 시간이 걸렸다. 병사들은 실탄 대신 공포탄을 쓰라는 지시를 받았고, 폭도들은 화염병과 공장 금속 조각으로 공격해 병사 약 100명이 부상했다. 하르첸코는 고르바초프가 병력 투입이 세 시간 늦었다고 한 설명을 부정하며, 파견 결정을 하루 동안 기다려 대응이 하루 늦었다고 주장했다. 이 지연에 대한 평가는 그의 회고로 귀속되지만, 현장 목격과 병력 도착 및 중앙의 논의는 소련의 초기 대응이 지체된 경과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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