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친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대장, T-34·카추샤를 거부한 원수
로켓포가 뭐가 필요하단 말이냐? 중요한 건 마차 견인포다.
차르친 전투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 장교로,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적군 포병총국을 이끌며 T-34·KV-1 전차, 카추샤 로켓포, 기관단총 도입을 모두 거부한 극단적 군사 보수주의자였다. 독소전 초기 야전 지휘의 연이은 실패로 1942년 원수 계급이 박탈되고 소장으로 강등되었으며, 1950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경력 연표
- 1918–1920제1기병군 포병대장
- 1926–1929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2–1936제3소총군단장 겸 군사위원
- 1937–1941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9–1941소련 국방 제1인민위원 대리
- 1941제54군 사령관
- 1943제4근위군 사령관
- 1944–1945군 편성·충원 총국 부국장
관련 역사 사건
무기 도입 거부와 군사 보수주의
쿨리크가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적군 포병총국(GAU)을 이끈 시기는 소련 군사 기술의 결정적 전환기였으나, 그는 일관되게 신무기 도입을 가로막았다. 그의 군사관은 1918년 차르친에서 형성된 이후 멈춰 있었고, 기동전과 독립 기갑부대를 주장한 투하쳅스키의 심층작전 이론을 맹렬히 반대했다.
T-34·KV-1 전차. 쿨리크는 보로실로프와 함께 T-34 중형전차와 KV-1 중전차의 양산 결정에 반대했다. 스탈린이 이를 기각하자, 그는 전차용 76.2mm 포탄 생산을 고의로 지연시켜 개전 당시 T-34와 KV-1의 12%만이 완전한 탄약 적재량을 갖추도록 만들었다. 더 나아가 바실리 그라빈이 설계한 F-34 76.2mm 전차포는 시험에서 기존 L-11보다 우수하고 저렴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음에도, 쿨리크는 L-11을 생산하는 레닌그라드 키로프 공장의 정치적 후원자로서 F-34의 채택을 막았다. 결국 독소전 초기 L-11 포로는 경장갑의 3호 전차조차 관통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그라빈이 몰래 비축해둔 F-34로 긴급 교체해야 했다.
카추샤 로켓포. 1938~39년 이미 실전 배치 가능했던 BM-13 카추샤 다연장 로켓포에 대해 쿨리크는 "로켓포가 뭐가 필요하단 말이냐? 중요한 건 마차 견인포다"라며 생산 승인을 거부했다. 카추샤는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1년 6월, 개전 며칠 전에야 긴급히 채택되었다.
기관단총. 독일군이 MP40 기관단총으로 충격부대를 무장시키는 것을 보고도 쿨리크는 기관단총이 "경찰용 무기"에 불과하며 병사들의 조준을 나쁘게 하고 탄약만 낭비한다고 주장했다. PPD-40의 보급을 차단했고, 이후 전선의 강력한 요구로 PPSh-41이 탄생했을 때는 이미 그의 손을 떠난 뒤였다.
지뢰. 쿨리크는 대전차 지뢰밭을 "약자의 무기"라고 부르며 공세 정신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이 결정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독일 기갑부대가 소련 방어선을 거의 자유롭게 우회할 수 있게 했다. 쿨리크가 물러난 뒤 지뢰밭은 레닌그라드 방어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주포병원수 니콜라이 보로노프는 쿨리크를 이렇게 회고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이 무오류하다고 믿었고, 부하들을 공포로 다스리는 것이 최선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과업을 내릴 때 즐겨 쓰던 말은 '감옥이냐 훈장이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