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헌

허헌
민족해방·반식민 운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족 1885–1951 ✕ 익사

3·1운동을 변론한 민족인권변호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된 진보적 민족주의자

3·1운동 재판에서 '공소불수리론'을 제출하자 일제 검사들이 법정에서 반발했고, 그 광경은 전국 신문에 보도되어 허헌을 항일변호사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3대 민족인권변호사'의 한 사람으로, 3·1운동 민족대표 47인을 변론하고 노동자와 독립운동가의 무료 변론을 도맡은 대표적 항일변호사였다. 1927년 좌우합작 단체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항일민족전선을 이끌었고,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와 남조선로동당 위원장을 거쳐 월북하여 조선 근대 민족운동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가교가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해방 이후의 정치 활동과 북행

1945년 해방 뒤 허헌은 여운형이 이끈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부위원장이 되었고, 9월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임되었다. 미군정과 우익 세력의 반대 속에 인민공화국이 실질적 정권으로 자리 잡지 못하자, 그는 1946년 2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수석의장을 맡았고 같은 해 11월 남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조선공산당 재건파와 직접 연계하지 않았다고 서술하며, 월북 시점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1947년경으로 추정한다. 1948년 8월 북쪽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의장으로 선출되고, 10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었다. 1949년 6월부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그는 1951년 8월 전쟁 중 병사한 것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기록하며, 영문 위키백과는 같은 달 청천강에서 익사했다고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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