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노켄티 니콜라예비치 스투코프

Иннокентий Николаевич Стуков
소비에트 러시아 1887–1936 ✕ 총살

좌파 공산주의에서 통합반대파까지 당내 좌익 노선을 일관한 혁명가

1918년 2월,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레닌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수용 방침에 반대하는 결의를 주도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6년의 감옥 생활과 유형을 겪은 혁명가로, 1918년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에 반대하는 좌파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다. 내전기 제5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우파 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이후 민주집중파(데치스트)·46인 성명·통합반대파에 차례로 가담하며 10년 넘게 당내 좌익 노선을 일관했다. 1927년 제명·유배 후 복귀하여 재정인민위원부 경제조사국장으로 일했으나, 1936년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18년 좌파 공산주의와 혁명전쟁론

스투코프는 1918년 1월~3월 브레스트-리톱스크 평화 조약을 둘러싼 투쟁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들의 가장 단호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1918년 2월 24일, 그는 당의 분열이 "가까운 장래에 거의 불가피하다"고 선언한 결의를 주도했으며, 이 결의는 독일과의 강화에 반대하는 일관된 혁명적 공산주의 세력의 결집을 목표로 했다. 이는 당 중앙위원회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지역 차원의 도전이었다.

그는 좌파 공산주의 기관지 『꼼무니스트(Коммунист)』의 핵심 필자였으며, 1918년 6월호에 게재된 「반혁명에 대한 투쟁」은 그의 대표적 이론 저작이다. 스투코프는 이 글에서 레닌의 '유예(передышка)'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독일이 서부전선의 소모로 인해 러시아를 즉시 점령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가정은 환상이며, 오히려 독일 제국주의는 우크라이나 점령과 크라스노프 장군 지원을 통해 러시아를 전략적으로 포위하는 '칸나에(Cannae)'식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일본·프랑스·영국 연합국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세묘노프 부대를 이용해 시베리아 철도를 장악하려는 움직임 또한 동일한 반혁명 전선의 일부라고 보았다.

스투코프의 혁명전쟁론은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와 인민의 게릴라 저항이라는 역사적 선례에 기대고 있었다. 그는 상비군이 아닌, 노동자·농민 대중이 제국주의 침략의 약탈적 성격을 자각할 때 비로소 가능한 유격전을 주장했으며, 이는 직업군대와 혁명전쟁의 양립 불가능성에 대한 급진적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그의 활동은 1918년 11월 독일 혁명으로 브레스트 조약이 무효화되면서 결정적 국면을 넘겼으나,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그의 모든 당내 반대파 활동(민주집중파, 46인 성명, 통합반대파)의 원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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