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백군 이민 사상으로 전향한 헤겔주의 법철학자
그는 『힘으로 악에 저항함』에서 "체포하고, 단죄하고, 사격할" 용기를 요구했고, 고리키는 이를 '복수의 복음'이라 불렀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고 교수가 된 러시아 법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다. 1905년 혁명기 급진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반볼셰비키 투쟁의 이론가로 전향,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되었다. 망명 중 『힘으로 악에 저항함』(1925)에서 무력 저항을 정당화했으며 파시즘을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건강한 현상'으로 옹호했다. 사후 저작은 솔제니친과 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민족주의·권위주의 담론의 핵심 원천이 되었다.
경력 연표
- 1909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사립강사
- 1918모스크바대학 법학 교수, 헤겔 연구로 석·박사 학위 취득
- 1922'철학자의 배'로 소비에트에서 추방, 베를린 망명
- 1923–1934베를린 러시아 학술연구소 교수
- 1927–1930『루스키 콜로콜』(러시아의 종) 편집자·발행인
- 1938나치 독일 떠나 스위스 정착, 라흐마니노프 재정 지원
- 1948–1954사후 『우리의 과업』으로 묶인 정치 에세이 집필
관련 역사 사건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
일리인은 망명 초기부터 이탈리아 파시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26년 「파시즘에 관한 편지」에서 무솔리니를 "정치적 조각가"로 찬양하며 파시즘을 "무신無信·무질서·탐욕의 심연에 대한 인류의 응답"으로 규정했다. 1928년 「러시아 파시즘에 관하여」에서는 파시즘이 백군 운동의 한 "종種"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며, 백군 정신 없는 파시즘은 내분과 분열로 귀결될 위험을 경고했다.
1933년 5월, 일리인은 나치의 정권 장악을 환영하는 논설 「국가사회주의: 새로운 정신」을 파리 망명지에서 발표하며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를, 히틀러가 독일을 이끄는 한 유럽 문화는 유예를 얻는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독일의 볼셰비키화에 관한 코민테른 지령」이라는 정보 보고서를 독일 내무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4년 7월, 반유대주의 선전 참여를 거부하여 러시아 학술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었고, 이오시프 헤센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차로 연행되어 심문받은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9월, 일리인은 「러시아와 독일의 불가피한 패배에 관한 테제」에서 "이 전쟁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십자군이라는 말은 거짓이거나 어리석다. 이 전쟁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와 싸우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전후에도 파시즘에 대한 근본적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논문 「파시즘에 관하여」에서 파시즘을 "건강한 것과 병든 것, 국가-수호적인 것과 파괴적인 것이 공존하는 복합적 현상"이라며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고, 프랑코의 스페인과 살라자르의 포르투갈에 찬사를 보냈다. 이 글은 홀로코스트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학자 하르트무트 뤼디거 페터는 그가 비판한 것이 "종교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부분적 인종주의"뿐이라고 지적한다.
일리인과 파시즘의 관계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옹호자들은 반공이 그의 중심 동기였고 주요 철학 저작은 파시즘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비판자들은 유기체적 민족관·지도자 숭배·반자유주의가 파시즘 사상과 구조적으로 일치한다고 본다. 그의 전집 28권이 1993년에서 2008년 사이 러시아에서 출간되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은 일리인의 『러시아 분열이 세계에 가져올 것』을 자주 다시 읽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