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이바노비치 마슬렌니코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Маслен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54 ✕ 자살

NKVD 부인민위원에서 육군대장까지: 두 세계를 오간 군사령관

1953년 보르쿠타 수용소 봉기. 마슬렌니코프가 협상장에 나타나자 수감자가 외쳤다 — 「장군! 41년에 우릴 무장도 없이 늪지에 버렸소! 우린 25년형인데 장군만 살아남으셨군요!」 마슬렌니코프는 묵묵히 끝까지 들었다.

철도원 아들로 내전에서 기병여단장까지 올랐고, 1928년 OGPU 국경군으로 이적해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939년 베리야에 의해 NKVD 부인민위원 겸 국경·내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독소전 발발 후 29군·39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반격 선봉, 캅카스 전투에서 북캅카스 전선군을 지휘해 바쿠 유전을 사수했으며, 1944년 제3발트 전선군 사령관으로 프스코프·타르투·리가를 탈환하고 육군대장에 올랐다. 대일전에서 바실렙스키 부사령관으로 관동군 격멸 작전을 입안해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MGB 부장관으로 복귀했으나 베리야 몰락 후 '부대로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추궁받다 1954년 4월 권총 자살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전후 보안기관 복귀와 보르쿠타 수용소 봉기

전후 3년간 마슬렌니코프는 바쿠·자카프카스 군관구를 지휘하는 야전군인으로 남았고, 1947~1948년에는 총참모부 군사아카데미 고등학술과정을 이수했다. 1948년 6월 10일 그는 다시 보안기관으로 불려가 MVD(옛 NKVD, 당시 MGB) 부장관 겸 부대 담당 책임자가 되어 1939년 당시의 지위를 사실상 회복했다. 이후 여러 차례 기구 개편을 거치며 권한 범위가 바뀌었고, 1951년 2월에는 내무군만 관장하도록 축소되었으며, 신설 MVD는 1939년처럼 많은 부대를 한 명의 지휘 아래 모은 적이 없었다. 1952년 1월 5일부터는 MVD 연합회의 위원을 겸했다.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과 베리야 체포·처형을 거치는 동안에도 그는 지위를 유지했다. 1953년 7월 19일(또는 22일) 시작된 보르쿠타 레흐라크 수용소 봉기는 파업 규모가 1만 8천 명에 이르렀고, 7월 29일부터 8월 1일까지 그는 검찰총장 로만 루덴코 등과 함께 봉기 수감자들과의 협상에 나섰다가 이후 진압에 참여했다. 8월 1일 수용소장 데레뱌코가 발포를 명령했고, 사상자 수치는 사료마다 다르다. 수감자 레오니트 마르키조프의 증언으로는 현장에서 42명이 사망하고 135명이 부상했으며,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유르쇼르에서 최소 53명이 사망했다고 전하고, 솔제니친은 66명으로 기록했다. 수식어 '미로노프'는 그가 제3발트 전선군 사령관 시절 사용한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베리야와의 오랜 관계, 그리고 베리야가 자기 휘하 부대로 정부를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에 대한 심문을 받았으나, 생전에도 사후에도 어떤 혐의로도 공식 기소된 적이 없다. 1954년 4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바간코보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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