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 메신저 보이에서 소련 조선공업 수장으로
전쟁 중 고리키의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조선소에서 그의 직접 감독 아래 12,000대의 T-34 탱크가 생산되었다. 조선 인민위원이 바다가 아닌 육상 전투를 위해 가장 많은 탱크를 찍어낸 역설이다.
니콜라예프 조선소의 심부름꾼으로 출발해 소련 조선공업을 17년간 이끈 생산 관료다. 1940년 조선공업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대양함대 건설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전시에는 조선소 대피와 잠수함·전투정 생산을 지휘하는 한편 탱크공업 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을 겸임했다. 전후 수송기계·중기계 분야를 거쳐 1954년 조선공업장관으로 복귀, 소련 해군의 원양화와 원자력 잠수함 시대의 산업 기반을 닦았다. 그의 아들 유리 노센코는 KGB 장교로서 미국에 망명, 냉전기의 대표적 이중 스파이 사건을 일으켰다.
경력 연표
- 1914–1928조선소 견습에서 니콜라예프 조선연구소 졸업까지
- 1928–1935마르티 공장에서 설계부장·주임 건조자로 성장
- 1935–1939레닌그라드 발트 조선소 주임기사·소장
- 1939–1940조선공업 제1부인민위원
- 1940–1946조선공업 인민위원 — 대양함대 계획과 전시 생산 지휘
- 1941–1942탱크공업 제1부인민위원 겸임, 12,000대 탱크 생산 관여
- 1947–1950수송기계공업 장관
- 1952–1956조선공업장관 — 전후 해군 재건과 원자력 잠수함 기반 구축
관련 역사 사건
전후 조선 프로그램과 쿠즈네초프와의 갈등
1945년, 해군 인민위원 니콜라이 쿠즈네초프는 항공모함을 포함한 균형 잡힌 원양 함대를 구축하는 10개년 조선 계획을 스탈린에게 제출했다. 쿠즈네초프의 구상은 미 해군과의 격차를 인식하고 소련 해군을 대양해군으로 전환하려는 야심찬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계획을 거부했고, 그 대신 노센코가 제출한 대안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노센코의 프로그램은 본질적으로 전쟁 전 제3차 5개년계획에서 실현되지 못한 조선 계획의 반복이었다. 이는 대형 수상함보다는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위주의 전통적인 전력 구성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노선이었다. 이 결정으로 전후 첫 10년간 248척의 디젤 잠수함과 619척의 수상함이 건조되었으나, 대부분은 이미 구식화된 함정들이었다. 1955년 소련 해군은 265척의 디젤 잠수함과 약 900척의 전투 수상함을 보유했지만, 그 80%는 연안 작전용에 머물렀다.
이 프로그램을 둘러싼 선택은 소련 조선공업과 해군의 발전 경로에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노센코의 현실적·산업적 접근이 당장의 생산량을 보장했다면, 쿠즈네초프의 구상은 이후 고르시코프 시대에야 비로소 실현되기 시작한 대양함대의 청사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센코 사후 불과 2년 만인 1958년, 소련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 K-3가 취역하며 그의 후임자들이 마주해야 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