캅카스의 문을 걸어잠근 기병 장군, 세 전쟁의 증인
1942년 여름, 독일 산악병들이 엘브루스 산에 나치 깃발을 꽂았다. 튤레네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미리 구축해 둔 테레크-그로즈니 방어선은 버텼고, 독일군은 석유에 닿지 못했다.
심비르스크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차대전에서 4개 등급의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모두 받은 완전 기사가 되었다. 내전에서는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정보과장과 기병여단장으로 싸웠고, 1940년 주코프·메레츠코프와 함께 소련 최초의 세 육군대장 중 한 명으로 진급했다. 1941년 남부전선을 지휘했으나 참패 속에 중상을 입었고, 1942년 2월 자캅카스 전선군 사령관에 부임하여 테레크 강과 그로즈니 방어선을 구축했다. 1942~43년 비터를 위한 캅카스 전투에서 독일군의 바쿠 유전 돌파를 저지한 것이 그의 가장 결정적인 군사적 공헌이었다. 전후에는 군관구 사령관과 기병 감찰감을 지냈고, 회고록 『세 전쟁을 넘어』를 남겼으며 1978년 사망 직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9–1920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4등급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완전 기사
- 1917치스토폴 사관학교 졸업, 10월 혁명 후 적위대 합류
- 1919–1920제1기병군 정보과장, 기병여단장으로 내전 참전
- 1938–1940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1940년 육군대장 진급
- 1941.06–08남부전선 사령관 — 몰도바·우만 후퇴, 드네프르에서 중상
- 1942–1945자캅카스 전선군 사령관 — 캅카스 방어전 지휘
- 1947–1958육군 기병 감찰감, 군관구 사령관, 전투훈련총국 근무
- 1958–1978국방성 감찰총감 그룹. 1978년 소비에트연방영웅 수여
관련 역사 사건
전간기의 기병 지휘관에서 군관구 사령관으로, 1922~1941
1922년 10월 군사아카데미를 마친 튤레네프는 모스크바 군관구의 독립기병여단장으로 배치되었다. 1924년 7월에는 제14마이코프 기병사단을 인수했고, 1925년 11월부터는 북캅카스 군관구의 기병·보충 감찰관, 1926년 8월부터는 부됸니의 이름을 딴 우크라이나 기병학교장을 지냈다. 1927년 11월에는 캅카스 적기군의 제2독립기병여단장이 되었고, 1929년 상급지휘요원 향상과정과 1930년 톨마초프 군사정치아카데미의 일장지휘관 당정훈련과정을 마쳤다. 1930년 11월에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제1독립특별기병여단의 여단장 겸 군정치위원이 되었으며, 1931년 11월부터는 노농적군 기병감찰관 보좌관, 1934년 7월부터는 기병 편성 관리부장, 같은 해 12월부터는 국방인민위원회 기병보충국장, 1936년 2월부터는 기병감찰관 부관을 지냈다. 1938년 2월에는 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겸 군사평의회 위원이 되었고, 같은 해 10월 7일에는 국방인민위원 산하 군사평의회 위원으로도 인준되었다.
1939년 9월 초 그는 키예프로 급히 소환되어 키예프 특별군관구 기병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같은 달 16일에는 우크라이나 전선의 카메네츠-포돌스크 집단군, 20일에는 남부 집단군, 24일에는 제12군 사령관을 맡아 소련의 폴란드 진군을 지휘했다. 작전이 끝나고 점령지에 군대가 배치된 뒤인 1939년 10월, 그는 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직으로 돌아갔다. 1940년 6월 군대에 장군 계급이 도입되면서 그는 주코프·메레츠코프와 함께 최초의 육군대장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 같은 해 8월부터는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맡았다. 1941년 3월에는 헝가리 공사 크리슈토피에게 1849년 헝가리 혁명 진압 당시 러시아군이 노획한 헝가리군 군기 56개를 정식으로 반환하는 자리에 섰다. 이 전간기 경력은 그가 기병 전문가로서 쌓은 실무 경험과, 군관구·전선급 편성 운영 경험이 상대적으로 얕았던 이력을 함께 보여준다. 1941년 남부전선에서의 지휘 실패를 두고 사료가 지적하는 '체계적 군사교육과 전선군 지휘 경험의 부족'은 바로 이 경력의 성격과 맞물려 있다.
그의 급진화 배경은 고향 마을의 조건과도 연결된다. 심비르스크현 샤트라샤니에서 러시아-투르크 전쟁 참전 군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06년 3년제 농촌학교 3학년을 마쳤고, 같은 해 12월 아버지가 그를 심비르스크로 데려가 전분공장에서 막일꾼으로 일하게 했다가 수입이 적어 곧 마을로 돌아왔다. 1905년 혁명 시기 이 마을에서는 농민 동요가 일어나 골리친 공작의 영지가 불탔고, 그 뒤 헌병과 군대의 탄압이 시작되어 아버지는 마을을 떠나 숨어야 했다. 그는 1907년 여름 카스피해 어업장으로 일하러 아스트라한으로 갔고 1913년 가을까지 그곳에서 일한 뒤 샤트라샤니로 돌아와, 같은 해 10월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되었다. 징병위원회는 그를 발트 함대로 배정했으나 신원 조사 뒤 카잔에 주둔한 제5카르고폴 용기병연대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