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독일노동자협회를 이끈 라살파 사회민주주의 지도자
독일의 라살파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이자 언론인·작가. 1863년 전독일노동자협회(ADAV)에 가입했고, 1864년부터 《사회민주주의자》를 발행·편집했다. 1867–1871년 협회 의장을 맡았으며 북독일연방 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권위적인 지도 방식과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정책에 대한 지지를 둘러싼 당내 갈등 끝에 1871년 정치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협회에서 제명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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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1872
전독일노동자협회대표
정치·당 지도- 전독일노동자협회 의장1867–1871
경력 연표
- 1857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로 활동
- 1863–1872전독일노동자협회 가입, 1872년 제명
- 1864.12–1871.04《사회민주주의자》 발행·편집
- 1867–1871전독일노동자협회 의장, 북독일연방 의회 의원
울리히스의 옹호와 성적 낙인을 이용한 정치적 공격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는 『남성 간 사랑의 수수께끼에 관한 연구』의 여덟 번째 저술 「Incubus」(1869)에서 슈바이처를 라살파 사회민주주의자로 지목하고, 동성애에 대한 낙인이 정파적 공격에 이용되는 사례로 다뤘다. 이 글은 자스트로 사건을 계기로 쓰였지만, 슈바이처에 관한 대목은 그와 별개의 1862년 만하임 사건을 회고한다. 울리히스에 따르면 슈바이처는 1862년 9월 5일 만하임 지방법원에서 ‘공공의 불쾌감 유발’과 관련한 처벌을 받았다. 울리히스가 젊은 남성과의 행위를 ‘대수롭지 않은 장난’으로 표현한 것은 그를 옹호하는 저자 자신의 평가다.
울리히스는 유권자들이 과거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를 의회 의원으로 선출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풍자지 《클라데라다치》가 1867년 10월 13일 라살레의 망령을 등장시켜 그를 노동자의 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시를 실었다고 전한다. 이어 슈바이처가 비스마르크의 숨은 지지자로 여겨지자 그 신문의 공격이 잦아든 반면, 반비스마르크 성향의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1869년 2월 21일자에서 남성에 대한 그의 관심을 암시하는 말장난을 실었다고 지적했다. 울리히스의 비판은 서로 다른 정치 진영이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필요에 따라 동원한다는 데 있었다.
같은 해 나온 확대판 「Argonauticus」 §8은 이 논의를 되풀이한다. 추가된 §63b에서는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이 1869년 8월 베를린 건축 노동자 파업에 대한 슈바이처의 관여를 젊은 노동자에 대한 성적 관심과 연결해 조롱한 사례를 들었다. 또 아이제나흐 노동자대회 뒤 한 신문이 과거의 재판을 근거로 그의 사생활과 정치적 신뢰성을 함께 공격했다고 인용하고, 이를 낙인을 찍는 행위에 빗대 비판했다. 노동운동 내부의 정치적 대립과 성적 낙인이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동시대 기록이다.
이 온라인 판본이 수록한 1994년판 서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서신도 논한다. 편집자는 엥겔스가 1869년 6월 22일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울리히스의 주장을 조롱하며 슈바이처를 언급한 대목과, 마르크스의 1865년 3월 10일자 편지에 나타난 슈바이처 공격을 소개한다. 이는 울리히스의 1869년 본문과 구별되는 후대 편집자의 해설이다.
출전(독일어 원문): 「Incubus」 서론 III, 원저 14–15쪽, 「Argonauticus」 §8·§63b, 1994년판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