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 출신으로 남침 작전계획을 완성한 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유성철 작전국장의 증언: '바로 내 앞에 가던 강건 총참모장의 지프가 폭발음과 함께 길옆으로 곤두박질했다. 지뢰였다. 강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만주 항일유격대와 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에서 활동한 김일성의 측근으로, 1948년 조선인민군 창군과 함께 초대 총참모장에 올랐다. 1950년 5월 29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중장과 함께 남침을 위한 '선제타격작전계획'을 완성했고, 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을 지휘했다.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된 9월 8일, 금강 인근에서 후퇴하는 국군이 매설한 지뢰가 탄 지프가 폭발해 즉사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직접 관을 운구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으며, 사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3–1940만주 항일유격대 및 동북항일연군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대위 계급
- 1946연변에서 활동 후 귀국,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 지휘
- 1948–1950조선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 1950.05바실리예프 중장과 남침 작전계획 완성
- 1950.06–09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전선 지휘
관련 역사 사건
전쟁 초기의 전선 지휘와 지휘상의 난관
1950년 7월 3일,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된 지 며칠 뒤 소련 측은 전선사령부를 설치하고 강건을 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평양에서 전선으로 이동해 작전에 직접 참여했다. 소련 대사 테렌티 스티코프의 기록을 인용한 후대 연구에 따르면, 강건은 소련 고문단의 지원 없이 군을 지휘하기 어렵다며 고문 파견을 요청했고, “고문들 없이는 군대를 지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38선 이남 지역에 고문을 보내지 않았다. 이 기록은 창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참모장이 실제 전쟁 지휘에선 소련 고문단에 의존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전선 상황이 악화되자 강건은 1950년 8월 18일 미군의 집중 공습으로 병력 대부분과 사령부를 잃고 사단장이 전사한 인민군 제4사단의 피해를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9월 8일 강건은 금강 도하 계획을 세우러 이동하던 중 지뢰 폭발로 사망했다. 당시 동행했던 전 작전국장 유성철은 1990년 회고에서 후퇴하는 국군이 매설한 지뢰가 강건의 지프를 폭발시켰다고 증언했다. 북조선과 소련 언론은 9월 11일 그의 사망을 보도했지만 사망 장소와 원인을 밝히지 않았다. 유성철의 증언은 당시 공개된 보도와 구별해 읽어야 하며, 구체적인 지점은 확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