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성

康生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마오주의 중국 중국 1898.11.4.–1975.12.16. ○ 자연사

옌안 정풍의 「구조(搶救)」 운동부터 문화대혁명까지 당의 보안·정보를 쥔 마오의 심문관

1975년 방광암으로 사망해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라는 추도사를 받으며 국장으로 묻혔으나, 사인방 재판 직전인 1980년 10월 사후 제명되고 바바오산에서 유해가 옮겨졌다.

산둥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상하이 지하활동을 거쳐 1933년 모스크바에서 왕밍의 오른팔로 소련 숙청을 배웠다. 1937년 옌안에 돌아와 마오 편에 서서 사회부장으로 정풍운동의 「구조 운동」을 지휘해 수천 명을 특무로 몰았다. 건국 후 한동안 물러났다가 1960년대 중소 논쟁과 문화대혁명에서 중앙문혁소조 고문으로 복귀해 류사오치·허룽 등 원로들에 대한 조사와 박해를 주도했다. 1975년 암으로 사망했고 1980년 당적을 박탈당했다.

다른 이름: 강생 · 자오룽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문화재 수집을 통한 사적 이득과 「명필」로서의 명성

캉성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신의 직권을 사적 이득을 위해 이용한 것으로 기록된다. 그는 그림과 서예에 능한 인물로서 골동품과 미술품, 특히 벼루를 모으는 취미를 권력으로 충족시켰다. 바이런과 팩에 따르면, 그는 문화재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희귀본 12,080권과 골동품 1,102점을 챙겼는데, 이는 각각 압수된 희귀본 전체의 34퍼센트, 골동품 전체의 20퍼센트에 해당하며,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2인자였던 린뱌오만이 그보다 많은 골동품을 가져갔다고 한다. 사후 그의 장서 34,000권과 유물 5,500점은 징산공원에 기증되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약탈한 개인 소장 문화재가 수만 점에 이르렀다고 서술하며, 그가 서화에 취미를 붙여 「명필」로 불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를 당과 국가와 인민에 가장 큰 손실을 안긴 문화대혁명의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규정했고, 개인적 이득을 위한 문화재 반출은 이 권력 남용의 한 측면으로 기록된다. 한편 그는 동시대 중국 최고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