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경제관계를 맡은 말기 경제 관료
치에르나 회담에서 카투셰프가 소련 입장을 변호하는 모습을 지켜본 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장 요세프 스므르콥스키는 그를 두고 "몰로토프 두 명을 합친 듯한 강경함"이라고 평했다.
고리키 자동차공장 엔지니어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후원 아래 급성장하여, 1968년 40세의 나이로 최연소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와의 협상에서 소련 측 실무를 맡았고, 이후 사회주의권 관계를 총괄했다. 1977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보되는 좌천을 겪었고, 이후 쿠바 대사를 거쳐 페레스트로이카기 대외경제관계 장관으로 개방 정책의 실무를 맡았다. 소련 붕괴 후에는 상업은행 경영진으로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경력 연표
- 1960s고리키 지역과 당 경제관리 라인에서 성장
- 1968–1977중앙위 서기, 산업·경제 조정 업무 담당
- 1977–1982각료회의 부의장, 경제 행정 실무에 관여
- 1982–1985코메콘 관련 대외경제 협력 업무 수행
- 1988–1991대외경제관계 장관, 페레스트로이카기 무역·합작 개방 관리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중앙위 서기 발탁
1968년 4월 10일, 카투셰프는 유리 안드로포프의 후임으로 중앙위 서기로 전격 발탁되어 사회주의 국가·코메콘·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관계를 총괄하게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가장 젊은 중앙위 서기였던 그의 급격한 승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곧 '프라하의 봄' 개입과 직접 연결된다. 1968년 7월 26~27일 정치국 회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와의 치에르나나트티소우(Čierna nad Tisou) 회담을 준비하던 카투셰프와 K. V. 루사코프가 작성한 초안은 표트르 셸레스트와 니콜라이 포드고르니로부터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72년부터는 중앙위 사회주의 국가 공산·노동자당 연락부장을 겸임했다. 중국과의 국경분쟁(다만스키 사건) 직후 알렉세이 코시긴과 함께 베이징으로 날아가 관계 정상화를 모색했고, 야노시 카다르의 헝가리 시장 실험을 지지했으며, 에리히 호네커의 동독-서독 현실주의 노선에도 이해를 보였다. 그러나 직설적인 화법과 독자적 소신으로 루사코프와의 경쟁에서 밀려, 결국 1977년 중앙위 서기직에서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보되는 좌천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