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VD에 고문당하고 살아 돌아와 레닌그라드 봉쇄를 뚫은 원수
1941년 6월 23일 체포되어 9월 6일 석방되었다. 회고록에는 두 달간 "내 의사와 무관한 사정"으로 모든 일에서 배제되었다고 적었다.
러시아 농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열두 살에 모스크바 제철공이 되었고, 1917년 수도그다에서 볼셰비키 세포를 조직해 서기가 되었다. 겨울전쟁에서 제7군을 지휘해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하고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참모총장이던 1941년 6월 23일 반소 군사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레포르토보에서 고문을 당했으나,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 9월 6일 석방되었고 수사 파일은 1955년 폐기되었다. 볼호프 전선과 카렐리야 전선을 지휘하며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를 깼고, 1945년 제1극동전선을 이끌어 관동군을 격파했다. 1944년 원수에 올랐고 1968년 사망해 유골이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7–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17수도그다에서 볼셰비키 세포 조직, 서기 겸 적위대 참모장
- 1918–19218월부터 적군 복무, 카잔 전투에서 부상, 1921년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2–1937벨로루시·극동군관구 참모장, 1936~1937년 스페인 내전 군사고문(가명 페트로비치)
- 1939–19401939년 12월 9일부터 제7군 지휘, 만네르헤임 선 돌파로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0–19411940년 8월부터 참모총장, 이듬해 1월 해임; 1941년 6월 체포·고문, 9월 석방
- 1942–1944볼호프·카렐리야 전선 사령관,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 돌파, 1944년 원수
- 1945제1극동전선 사령관, 관동군 격파로 승리훈장
- 전후연해·모스크바·백해·북부 군관구 사령관, 국방성 감찰총감으로 현역 유지
관련 역사 사건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내전 참전
- 1936–1939스페인 내전소련 군사고문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이탈리아 지원군단을 저지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 1939.11–1940.03겨울전쟁제7군 사령관 · 만네르헤임 선 돌파레닌그라드 군관구와 제7군을 이끌고 지협 정면을 맡아 초기 정체를 겪었으나, 재편 뒤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해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됐다.
- 1941–1945대조국전쟁볼호프·카렐리야 전선군 사령관, 제1극동전선군 사령관개전 이틀 만에 체포·고문당했다가 9월 석방되어 전선에 복귀했다.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으로 1943년 1월 이스크라 작전에서 레닌그라드 봉쇄를 돌파했고, 1944년 카렐리야 전선군 사령관으로 페차모-키르케네스 작전을 지휘해 노르웨이에서 전쟁을 마쳤다. 1944년 10월 원수 진급. 1945년 8월 제1극동전선군을 지휘해 관동군 격파의 주타격을 가했고 승리훈장을 받았다.
- 1941–1944레닌그라드 봉쇄볼호프 전선 사령관키릴 메레츠코프는 볼호프 전선의 서진을 지휘해 1943년 1월 18일 레닌그라드 전선과 연결하고 육상 회랑을 열었다.
- 1945.08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제1극동전선군 사령관제1극동전선군 사령관으로 동쪽 공격을 지휘했다. 6월 26-27일 회의에서 홋카이도 점령을 주장했으나 주코프와 몰로토프의 반대에 부딪혔다.
1941년 체포와 NKVD 고문
독소전이 발발한 이튿날인 1941년 6월 23일, 메레츠코프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NKVD에 체포되었다. 이미 숙청된 군 지휘관들이 그를 '반소비에트 군사음모'에 가담했다고 진술한 데 근거한 것이었다. 레포르토보 감옥에 수감된 그는 블로지미르스키, 시바르츠만, 로도스, 이바노프 등 악명 높은 수사관들에게 조사를 받았다. 고무 곤봉으로 구타당했고, 보리스 로도스에게 갈비뼈가 부러지는 고문 끝에 허위 자백서에 서명했다.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체포 전 메레츠코프가 "건장하고 인상적인 젊은 장군"이었으나 석방 후에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야위어 예전의 그림자에 불과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구금 중 NKVD 수사관들이 자신의 머리에 소변을 보았다고 동료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두 달간의 구금 끝에 메레츠코프는 수감 중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 전선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1941년 9월 6일 스탈린의 구두 지시로 전격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완전한 군복 차림으로 스탈린 앞에 서게 된 그는 곧바로 제7군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그의 수사 파일은 1955년 KGB 의장 세로프의 지시로 폐기되어 사건의 전모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1968년 회고록에서 메레츠코프는 이 사건을 단 한 문장으로 처리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1942년 볼호프 전선: 류반과 제2충격군
석방 후 메레츠코프는 1941년 9월 24일부터 제7독립군을, 11월 9일부터 제4독립군을 지휘했고, 12월 17일 볼호프 전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2년 1월 그는 레닌그라드 봉쇄를 풀고 대규모 독일군을 포위한다는 목표로 류반 방면의 새 공세를 시작했다. 티흐빈 반격 이후 최고사령부는 그에게 새 볼호프 전선을 편성하도록 명령했고, 그는 1942년 5월과 6월을 제외하고 1944년 2월까지 이 전선을 지휘했다.
류반 방면의 진격은 매우 느렸다. 독일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증원되었으며 더 이상 전선이 늘어나 있지 않았다. 3월이 되자 포위의 고리를 닫으려던 두 소련군은 25km도 되지 않는 거리까지 접근했으나 더는 전진할 수 없었다. 3월 15일 독일군이 반격해 제2충격군을 차단했고, 소련군은 격전 끝에 3월 30일에야 연락을 회복했다. 메레츠코프는 최고사령부에 회복된 통로를 보고하면서 그 폭이 2km에 불과하고 독일군의 공습과 포격에 상시 노출되어 수송 능력이 매우 낮다는 점을 빼놓았다. 그 결과 최고사령부는 제2충격군을 아직 철수시킬 수 있었던 시기에 철수하지 않았다. 4월 말부터 5월까지 볼호프 전선은 호진 중장의 레닌그라드 전선에 일시 예속되었고, 메레츠코프는 서부 전선에 부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1942년 5월 제2충격군은 보급 부족과 사기 저하에 시달렸다. 5월 30일 독일군이 두 번째 공세를 시작해 다시 포위했고, 6월 5일 포위된 부대의 일부가 탈출한 뒤 나머지는 조직적으로 파괴되었다. 약 3만 3천 명이 포로가 되었고 그에 맞먹는 수가 전사했으며 약 1만 명이 빠져나왔다.
패배의 책임을 두고는 평가가 갈린다. 전투 직후 메레츠코프는 포로가 된 제2충격군 사령관 안드레이 블라소프에게 책임을 돌렸는데, 그를 그 직위에 추천한 것은 1942년 4월의 자신이었다. 이 주장은 그의 전후 회고록에도 이어졌고, 블라소프가 이후 독일에 협력했기 때문에 소련 시기에는 거의 재검토되지 않았다. 데이비드 글란츠는 블라소프의 이후 행적과 무관하게 1942년 5~6월 당시 그의 지휘 수준이 대부분의 다른 군 사령관과 다르지 않았으며, 작전을 계획하고 수행한 전선 사령관으로서 메레츠코프에게도 패배의 책임이 일부 있다고 반박한다.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 호진은 6월 8일 해임되고 강등되었으며 다시는 전선을 맡지 못했다. 한 평가는, 불과 1년 전 체포되었던 메레츠코프가 참패의 책임을 인정할 경우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책임을 돌렸다고 설명한다.
1942년 시냐비노 국면에서 양측은 상대의 계획을 모른 채 각자 공세를 준비했다. 소련의 시냐비노 공세는 실패했고 제2충격군은 1년 사이 두 번째로 궤멸되었으나, 독일군도 큰 손실을 입고 노르트리히트 작전을 취소했다. 메레츠코프는 추가적인 국지 공세를 요구했으나 최고사령부가 단호히 거부했고, 그는 작전 수행과 관련해 1942년 10월 15일 공식 비판을 받았다. 류반 이후에도 그는 볼호프 전선 사령관으로 남았고, 새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 고보로프와 함께 봉쇄를 깨는 공세를 계획했다. 이 계획은 1942년 12월 최고사령부의 승인을 받아 이스크라 작전이 되었다. 1943년 1월 13일 시작된 작전에서 소련군은 1월 18일 결합했고 1월 22일 전선이 안정되었으며, 폭 8~10km의 육로 통로가 열려 도시 함락과 독일-핀란드 연결의 가능성이 사라졌다. 1943년 1월 28일 메레츠코프와 고보로프는 함께 수보로프 훈장 1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