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리옹 게슈타포 책임자
1987년 리옹 재판에서 그는 이지외 급습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지스탕스와 싸웠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클라우스 바르비는 나치 친위대와 보안방첩대에서 활동한 장교로, 점령기 리옹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박해했다. 그는 칼뤼르에서 장 물랭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지외의 유대인 아동 44명과 교사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책임이 있었다. 전후 미국 정보기관의 반공 작전에 이용되어 볼리비아로 도피한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피했지만, 1987년 리옹 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례는 나치 범죄의 연속성과 냉전 반공주의가 만든 면책의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5친위대 입대, 보안방첩대 복무
- 1940–1941암스테르담 보안방첩대, 유대인·공산주의자 탄압
- 1942디종 파견, 점령 프랑스 보안 업무
- 1942–1944리옹 게슈타포장, 레지스탕스 탄압과 유대인 강제이송
- 1947–1951미군 방첩대 정보원
- 1951–1983볼리비아에서 클라우스 알트만으로 활동
- 1987리옹 재판, 반인도적 범죄 유죄 및 종신형
- 1991리옹 교도소에서 사망
관련 역사 사건
볼리비아 망명과 반공 전략가로서의 30년
1951년 바르비는 미국 방첩대(CIC)의 도움으로 남아메리카로 빠져나가 볼리비아에 정착했고, 이후 30여 년 동안 클라우스 알트만이라는 이름으로 코차밤바에서 살았다. 프랑스는 이미 1947년과 1954년에 궐석으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볼리비아는 인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볼리비아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960년대 르네 바리엔토스 정권에서는 정보·고문·심문 기술을 전수했고, 1970년대 우고 반세르 정권에서도 공개적으로 협력하며 야당과 진보 세력에 대한 불법 체포·심문·살해에 가담했다. 같은 시기 볼리비아 군에서 중령 계급을 받았으며, 1965년에는 서독 정보기관 연방정보국(BND)에 '아들러'라는 암호명으로 등록되어 최소 35건의 보고를 보냈다.
1980년 루이스 가르시아 메사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를 둘러싼 그의 역할은 가장 논쟁적인 대목이다. 여러 연구와 증언은 그가 쿠데타 세력과 코카인 밀매업자 로베르토 수아레스 고메스 사이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으며, 외국 신나치 용병들로 조직된 준군사 조직 '죽음의 예비신랑들'을 만들었다고 본다. 1979년 수아레스로부터 쿠데타 자금 500만 달러를 요구했다는 증언도 있다. 다만 이 시기 그의 정확한 역할과 범위는 사료마다 강조점이 다르므로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1983년 2월, 새로 들어선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 민정은 그를 라파스에서 체포해 프랑스로 넘겼고, 그로써 33년에 걸친 면책의 시기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