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페트로비치 고르셰닌

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 Горше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7–1978 ○ 자연사

소련 최초의 검찰총장, 전범 재판을 조직하고 흐루쇼프에게 대숙청 통계를 올리다

1954년 2월, 고르셰닌은 흐루쇼프에게 1921년 이래 반혁명죄로 사형·유형·수용된 자의 정확한 숫자를 담은 증명서를 올렸다. 스탈린 사후 처음 나온 그 숫자는 해빙기 복권의 출발점이었다.

알라티리의 철도 노동자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소비에트법 연구소를 졸업하고 노동법 학자로 출발했다. 1943년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시 사법을 총괄했고,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소련 전역의 사형 선고를 승인하는 한편 블라소프·크라스노프 재판과 뉘른베르크·도쿄 전범 재판 준비를 주도했다. 1948~1956년 소련 법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사법 제도 정비를 이끌었고, 1954년 2월 흐루쇼프에게 1921년 이래 대숙청 희생자 통계를 담은 공식 증명서를 제출했으며, 1956년 주코프·루덴코와 함께 옛 포로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중앙위원회 결의를 공동 발의했다. 법무부 폐지 후에는 전연방 법학연구소 소장으로 학계에 복귀하여 소비에트 노동법전 편찬 작업에 헌신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전범 공개 재판의 조직 (1943~1949)

독소전쟁기 소련 사법의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는 점령지에서 자행된 학살을 공개 법정에서 다루는 일이었다. 고르셰닌은 1943년 11월 13일 소련 검찰총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12월 15~18일 하리코프에서 열린 재판이 소련 영내에서 외국 군사범죄자를 대상으로 열린 최초의 공개 재판이 되었다. 독일군 장교·병사와 소련인 협력자 가운데 3명이 1943년 4월 19일자 최고소비에트 상무위원회 칙령 제1조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들은 다음 날 하리코프의 블라고베셴스키 시장에서 4만여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이 재판에서 다뤄진 자료 가운데 일부는 훗날 뉘른베르크 재판에 증거로 제출되었으며, 명령이 집단살해의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여기서 법적 선례를 얻었다.

고르셰닌은 1948년부터 독일군과 독일 징벌기관 출신자들의 주요 사건을 공개 재판에 회부하는 상설위원회를 이끌었다. 1943~1949년 사이 소련 각지에서는 외국인 피고인 19건의 공개 재판이 열려 모두 25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대부분은 독일군인이었으며 일부는 공개 교수형, 나머지는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은 언론인과 일반 시민에게 개방된 대형 재판정에서 진행되었고, 일부는 거리로 중계되었으며 피고인에게는 소련 변호인이 붙었다. 고르셰닌은 독일 전범 재판뿐 아니라 일본 전범 재판 준비에도 관여했다. 1949년 11월 말에는 내무장관 크루글로프, 검찰총장 사포노프와 함께 몰로토프에게 하바롭스크 재판 피고인들의 죄명을 바꿔 1943년 4월 19일자 칙령 제1조로 재판하자고 제안했는데, 일본인은 그 칙령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범행이 독일 파시스트 군대의 범행과 유사하다는 것이理由였다. 제안대로 1949년 12월 5일 모든 피고인에 대한 죄명이 변경되었다.

이처럼 검찰총장 재임기의 고르셰닌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처벌하려 한 전쟁범죄를 다루는 법적 절차를 설계하고 운영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는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소련 전역의 사형 선고를 승인했고, 나중에는 1921년 이래 반혁명죄로 처벌된 사람들의 통계를 직접 흐루쇼프에게 올렸다. 공개 재판을 통해 대외적으로 법의 심판을 세우는 일과, 비공개 절차로 자국민에 대한 대량 탄압을 관리하는 일이 같은 기관, 같은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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