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기술자에서 소비에트 외교의 설계자로, 서구 자본과 거래할 줄 알았던 유일한 볼셰비키
1893년, 젊은 크라신은 톨스토이를 찾아가 혁명의 필연성을 설파했다. 비폭력을 설교하던 대문호는 격노하여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고 동석했던 아내 류보비는 기록했다.
차르 치하의 시베리아 유형에서 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책임자로, 다시 소비에트 국가의 초대 대외무역인민위원으로, 크라신의 궤적은 볼셰비키 안에서도 독보적이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기술단을 지휘하며 무기 조달·자금책을 맡았고 바쿠 지하 인쇄소 '니나'로 《이스크라》를 찍어냈다. 1909년 정계에서 물러나 기술자로 복귀, 지멘스의 러시아 총대표까지 올랐다가 1918년 레닌의 부름으로 귀환했다. 대외무역 독점 체제와 1921년 영소통상협정을 주도한 서구 비즈니스계 유일의 고위 볼셰비키로, 레닌은 그를 당내 가장 유능한 실무 조직가로 평했다.
경력 연표
- 1903–1907RSDLP 중앙위원회 위원
- 1905RSDLP 중앙위원회 전투기술단 책임자
- 1913–1917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대표
- 1918–1920RSFSR 통상산업인민위원
- 1919–1920RSFSR 교통인민위원
- 1920–1925소련 대외무역인민위원
- 1921–1923RSFSR·소련 전권대표 (영국)
- 1924–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관련 역사 사건
레닌 시신 보존과 영생의 과학
레닌이 1924년 1월 사망하자 크라신은 당 중앙에 『불멸화에 관하여』라는 글을 제출하며 시신을 영구 보존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시신을 금속 유리 상자에 넣어 냉동 보관할 것을 제안했고, 대외무역인민위원이라는 지위를 활용해 독일에서 특수 냉동 장비를 수입할 허가를 받아냈다. 이 구상의 배경에는 19세기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표도로프의 사상이 있었다: 과학의 힘으로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급진적 코스미즘이었다. 크라신은 1921년 레프 카르포프의 장례식에서 "과학이 전능해져 죽은 유기체를 재창조할 시대가 올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는데, 이는 유물론을 표방한 볼셰비키 지도부 안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당초 냉동 보존 계획은 시신 부패가 시작되면서 무산되었고, 대신 블라디미르 보로비요프와 보리스 즈바르스키의 화학 방부 처리법이 채택되었다. 크라신은 루나차르스키와 함께 영구 묘소 설계 공모전을 주관했고, 임시 목조 묘소가 붉은 광장에 세워졌다. 그의 구상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지만, 레닌의 시신을 "예루살렘이나 메카와 같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순례지"로 만들겠다는 그의 발상은 이후 반세기 넘게 지속된 소비에트 레닌 숭배의 원형을 제공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일화에서 크라신의 독특한 지적 궤적을 읽는다: 차르 경찰서장의 아들로 태어나 최첨단 전기 기술을 익히고, 지멘스 중역과 볼셰비키 폭탄 제조자를 오가며, 마지막에는 기계의 냉기로 혁명의 육체를 구원하려 했던 한 엔지니어-혁명가의 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