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라일 모이세예비치 레플렙스키

Израиль Моисеевич Леплевский
소련 벨라루스 1896–1938 ✕ 처형

우크라이나 대량작전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자

GB 소령 우샤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레플렙스키는 자신의 상관인 예조프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출신의 체키스트. 벨로루시 NKVD를 거쳐 우크라이나 NKVD 수장으로 대숙청 대량작전을 주도했으며, 예조프의 측근으로서 가장 먼저 숙청된 이들 중 하나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군부 파시스트 음모 사건과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레플렙스키는 니콜라이 예조프, 미하일 프리놉스키와 함께 소위 '노농적군 내 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의 핵심 조작자였다. 1936년 11월 국가보안총국(GUGB) 특별부장으로 임명된 그는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를 비롯한 붉은 군대 최고위 지휘관들을 겨냥한 조작 수사에 착수했다. 특별부는 체포된 군 장교들로부터 자백을 추출하기 위해 이른바 '컨베이어(연속 심문)' 기법을 동원했으며, 이렇게 얻은 '증언'이 투하쳅스키와 그 측근 7명을 1937년 6월 11일 비공개 재판에 세우고 이튿날 처형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투하쳅스키 사건 직후인 1937년 6월 14일, 레플렙스키는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으로 전격 발령되었다. 이는 군부 숙청의 방법론을 전 연방 규모로 확대하기 위한 인사였으며, 그의 우크라이나 부임은 공화국 전역에 걸친 '우익-트로츠키스트 지하조직' 적발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작전 규모가 워낙 방대했던 탓에 1937년 8월에는 예조프의 측근 레오니트 벨스키가 이끄는 모스크바 점검위원회가 키예프에 파견될 정도였다.

레플렙스키의 조작 작업은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이른바 '우익-트로츠키스트 블록' 재판)의 예비 수사 단계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등 구당 지도부를 겨냥한 이 재판은 대숙청의 정점을 이루는 쇼 재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레플렙스키 자신은 그 재판이 열리던 바로 그 무렵 이미 체포되어 있었고, 불과 4개월 뒤 자신이 공들여 다듬었던 바로 그 법적 절차의 희생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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