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미하일로비치 카라한

Лев Михайлович Карахан
소련 아르메니아 1889–1937 ✕ 처형

중국에 대한 짜르 불평등조약을 폐기한 1919년 카라한 선언의 주역

1925년 베이징 외교단 단장이 된 카라한. 부르주아 예법을 조롱하던 볼셰비키였지만, 그가 은빛 육두마차를 타고 흰 장갑을 낀 연미복 차림으로 등장하자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흰 장갑을 우아하게 낄 줄 아는 볼셰비키."

아르메니아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1904년 15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처음에는 멘셰비키였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서기를 지낸 뒤 외무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19년 '카라한 선언'을 기초·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모든 불평등조약과 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아시아 정책의 기초를 이룬 문서가 되었다. 주중 대사 시절 1924년 중소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대숙청 중 '친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사형당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카라한 선언 (1919): 제정 불평등조약의 폐기

1919년 7월 25일, 카라한은 외무부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으로서 '중국 인민과 남·북 중국 정부에 대한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 문서는 훗날 '카라한 선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문서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가 청나라와 체결한 모든 불평등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만주 영토, 치외법권, 경제적 특권, 의화단 배상금 지분을 중국에 반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유럽 열강 가운데 처음으로 중국을 평등한 주권 국가로 대우한 외교 문서였으며, 쑨원을 비롯한 중국 지식인과 민족주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선언이 조성한 호의적인 분위기는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의 사상적 토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카라한 선언의 원문과 실행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선언 발표 한 달 만에 소비에트 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중국동방철도(CER) 반환 약속이 삭제된 수정판을 게재했고, 1923년에는 모스크바가 선언 자체의 존재를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1924년 5월 31일 체결된 중소협정은 치외법권 포기를 재확인했지만 중국동방철도의 중소 공동 관리를 규정했고, 외몽골에 대한 소비에트 영향력도 사실상 유지했다. 이처럼 카라한 선언은 반제국주의적 원칙 선언과 현실정치적 이해관계 사이의 긴장을 극명하게 보여준 역사적 문서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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