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시기 변증법적 유물론을 국가 교리로 제도화한 철학 총책
「철학 전선의 절대다수가 적, 배신자로 밝혀져 NKVD에 체포되었다」 — 1937년 5월 철학연구소 총회에서 동료 철학자들의 대숙청을 정당화하며
데보린 학파를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몰아내고 스탈린주의 철학을 제도화한 소련 철학계의 최고 책임자. 30년간 당적 통제를 상징했으나, 말년에 표절 파문으로 퇴진했다.
경력 연표
- 1901지토미르 유대인 가정 출생, 본명 모르드코 게르셰비치 게르시코비치
- 1919–1921RKP(b) 입당(1919), 지토미르 시·볼린 현 콤소몰 제1서기, 특수임무부대(CHON) 복무
- 1921–1929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수료, 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공산주의교육아카데미 부총장
- 1931–1933데보린 학파에 대한 철학 논쟁 주도 —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유딘과 함께 스탈린주의 철학 노선 확립
- 1931–1944『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주필, 공산아카데미·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활동,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9–1944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IMEL) 소장, 중앙위원(1939~1961), 『철학사』 3권으로 스탈린상 1등급(1943)
- 1944–1950스탈린상 철회 후 주필·소장직 해임, 『볼셰비키』 편집국 책임비서, 고급당학교 변증법적유물론 주임
- 1950–1968부쿠레슈티 코민포름 기관지 주필(1950~1956), 즈나니예 협회장(1956~1960), 『철학의 제문제』 주필(1960~1968), 표절 파문으로 퇴진
- 1970–1987국가와법 연구소 분과장(1970~1985), 플레하노프상 수상(1982), 노환으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관련 역사 사건
데보린 학파 숙청과 스탈린주의 철학의 제도화
1920년대 소련 철학계는 '변증법자'(데보린 학파)와 '기계론자'의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1929년 데보린이 기계론자를 논쟁에서 꺾고 철학연구소를 장악했으나, 그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30년 6월, 미틴은 파벨 유딘, 그리고 적색교수양성소의 젊은 철학자들과 함께 『프라우다』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새로운 과제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고, 이어 8월에는 「레닌의 철학 유산의 진정한 발전을 위하여」를 게재했다. 이 글들은 데보린 학파를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라 비판하며 헤겔을 과도하게 숭상하고, 레닌의 철학적 기여를 과소평가하며,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용인했다고 공격했다.
스탈린은 미틴-유딘 그룹에 명백한 지지를 보냈다. 1930년 12월, 스탈린은 적색교수양성소 당 세포 대표들과의 면담에서 데보린 진영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못 박으며 정치적 낙인을 찍어주었다. 이 면담 직후 미틴은 잡지 『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의 주필로 임명되어 데보린을 편집국에서 축출했고, 공산아카데미 철학연구소의 실질적 지도권도 장악했다.
1931~1933년에 걸친 조직적 공세로 데보린 학파는 철학계에서 완전히 제거되었고, 변증법적 유물론은 스탈린-레닌주의 체계에 종속된 공식 교리로 재편되었다. 1936~1937년 대숙청기에는 이 철학 논쟁이 물리적 숙청으로 비화하여, 미틴의 전 동료·제자·부하직원 수십 명이 반당분자로 체포·처형되었다. 미틴 자신은 1937년 5월 철학연구소 총회에서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간부들의 절대다수가 적, 배신자로 밝혀져 NKVD에 체포되었다"고 보고하며 이 숙청을 정당화했다.
이 캠페인을 통해 미틴은 30년간 소련 철학을 당이 직접 통제하는 체제의 설계자이자 수호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으며, 이후 소련 철학은 독자적 탐구보다 당 노선의 해설과 정당화에 복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