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서클에서 좌파 에스에르까지, 반세기 러시아 혁명운동의 위대한 결집자
'레닌과 나는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 — 1919년 망명 직전, 반세기 동지였던 볼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하다.
마르크 나탄손은 1870년대 차이콥스키 서클, '토지와 자유', '인민의 권리'의 공동 창립을 주도하고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을 지낸, 러시아 혁명운동의 조직적 골격을 반세기 동안 연결한 핵심 조직가이다. 탁월한 결집력으로 '혁명의 이반 칼리타'로 불렸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치메르발트·킨탈 회의에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레닌과 협력했다.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과 혁명적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나, 일당 독재로 기운 볼셰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채 망명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06– 정치·당 지도 · 사회혁명당
- 1917– 정치·당 지도 · 좌파 사회혁명당
경력 연표
- 1871차이콥스키 서클 공동 창립
- 1876플레하노프와 카잔 광장 시위 조직; '토지와 자유' 결성 주도
- 1893'인민의 권리'당 창립
- 1906사회혁명당 중앙위원 선출
- 1915–1916치메르발트·킨탈 회의 참가
- 1917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 1918혁명적 공산당 공동 창립
관련 역사 사건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토지와 자유'까지: 조직가의 형성 (1869–1877)
나탄손은 1860년대 말 상트페테르부르크 의학외과학아카데미의 학생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던 네차예프의 급진주의에 맞서, 그는 도덕적 자아완성과 계몽을 앞세운 차이콥스키 서클(1871)의 공동 창립을 주도했다. 차이콥스키 서클은 이후 수십 년간 러시아 혁명운동의 인적 토대로 기능할 인물들을 길러냈다. 나탄손 본인은 1869–71년 사이 세 차례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됐고, 1872년 아르한겔스크 주로 유배됐다. 그곳에서 뒤따라온 민중주의자 올가 슐레이스네르와 결혼하기 위해 같은 해 정교회로 개종했다.
1875년부터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전국의 혁명적 서클을 하나로 묶는 데 몰두했다. 러시아 중부와 남부 도시들을 직접 순회하며 단결을 호소했고, 1876년 12월 6일 카잔 광장 시위(플레하노프와 함께 조직)의 지도부에 섰다. 북부 혁명적 민중주의 그룹은 1878년 말 '토지와 자유'로 이름을 고쳤다. 그의 조직력에 대한 신뢰는 극적이어서, 민중주의자 드미트리 리조구브는 나탄손의 전권 처분에 자신의 전 재산 20만 루블을 맡겼고, 혁명계는 그를 '러시아 땅을 모은' 이반 칼리타에 비유해 불렀다. 1877년 6월 다시 체포된 나탄손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갇혔다가 1879년부터 시베리아 유배를 보냈고, 이로써 활동의 첫 국면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