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의 아들 세도프의 측근으로 위장한 NKVD 첩자, 뒷날 미국의 인류학자
1955년 즈보롭스키는 이그나티 레이스의 미망인을 찾아가 NKVD 요원임을 털어놓았다. 세도프가 죽었을 때 넋이 나가 보였다는 그녀의 말에 그는 답했다. “그날이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더는 그를 염탐하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우만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1921년 가족과 폴란드로 옮겼고,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공부했다. 1933년쯤 파리에서 NKVD에 포섭되어 ‘에티엔’이라는 이름으로 레프 세도프의 최측근이 되었다. 『반대파 회보』 편집과 트로츠키 문서 보관까지 맡으며 트로츠키파를 내부에서 보고했고, 세도프가 입원한 병원도 NKVD에 알렸다.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자 감시를 이어 갔다. 전후 인류학자로 『삶은 사람들과 함께』를 공저했으나, 오를로프의 1955년 증언으로 정체가 드러나 위증죄로 복역했다. 뒤에 통증 연구자로 활동했다.
다른 이름: 마크 즈보롭스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21가족과 폴란드로 이주
- 1928프랑스로 이주, 그르노블 대학 재학
- 1933–1941파리에서 NKVD 요원으로 활동, 트로츠키 조직 침투
- 1938.02.16레프 세도프 사망
- 1941–1945미국에서 망명자 감시 (암호명 튤립, 칸트)
- 1947미국 시민권 취득
- 1952『삶은 사람들과 함께』 공저 출간
- 1955.09오를로프가 상원 소위원회에서 그의 정체를 폭로
- 1962재심 끝에 위증죄로 징역 4년 선고
- 1969『고통 속의 사람들』 출간
관련 역사 사건
그는 어떻게 세도프의 오른팔이 되었나?
즈보롭스키는 1908년 우만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친구들에게 한 이야기에 따르면 혁명을 피해 1921년 부모와 폴란드로 옮겼고, 학생 때 폴란드 공산당에 들어갔다가 감옥살이 끝에 독일을 거쳐 프랑스로 왔다. 1928년부터 그르노블에서 웨이터로 일하며 공부하다가 공산주의자들의 포섭을 받았고, 1933년 파리에서 NKVD 요원이 되었다. NKVD에 낸 이력에는 소련에 누이와 형제 둘이 산다고 적었다.
그의 임무는 트로츠키의 아들 레프 세도프의 파리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에티엔’이라는 이름으로 세도프의 아내와 친해진 그는 곧 비서로 추천되었다. 성실하고 고분고분했고, 프랑스인이 대부분인 조직에서 러시아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직의 중앙위원이 되었고, 세도프의 편지를 읽고 답장했으며, 『반대파 회보』 러시아어판을 편집하고, 트로츠키 문서 일부를 자기 집에 보관했다. 그 모든 것이 NKVD로 보고되었다. 이그나티 레이스 살해에 관해서도, 그의 위치를 드러낸 편지 내용을 그가 넘겼다고 레이스의 미망인은 확신했다.
세도프의 죽음에 그는 어떻게 얽혔나?
1938년 2월 8일 세도프가 급성 맹장염으로 쓰러지자, 즈보롭스키는 러시아 망명자들이 운영하는 작은 개인 병원에서 비밀리에 수술받으라고 설득했고 그 위치를 곧바로 NKVD에 알렸다. 수술 뒤 며칠간 회복하는 듯하던 세도프는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16일 31살로 죽었다. NKVD가 그를 죽였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지금도 갈린다.
트로츠키는 에티엔을 조사하라고 루돌프 클레멘트에게 맡겼으나, 클레멘트는 그해 납치·살해되어 머리와 다리가 잘린 시신으로 센강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즈보롭스키는 릴리야 에스트린 달린과 함께 『반대파 회보』를 이끌며 파리의 트로츠키파 안에 분열을 심었다.
경고는 내부에서도 왔다. 망명한 오를로프가 트로츠키에게 익명 편지를 보내 ‘마르크’라는 NKVD 요원을 경고한 것이다. 이 편지의 시점은 1938년 8월로 보는 연구와 1939년으로 적는 자료로 나뉜다. 트로츠키는 달린의 설득으로 이를 NKVD의 속임수로 여겼다.
미국의 인류학자는 어떻게 정체가 드러났나?
1941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달린 부부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얻었고, 그 뒤 튤립과 칸트라는 암호명으로 망명자들을 계속 감시했다. 이 활동은 베노나 문서에도 남아 있다. 전향자 빅토르 크랍첸코를 찾는 일도 그가 맡았다.
1945년 무렵 첩자로서의 쓸모가 다하자 그는 학계로 옮겼다. 마거릿 미드의 도움으로 하버드에서 연구직을 얻었고, 1952년 엘리자베스 헤르조그와 함께 쓴 『삶은 사람들과 함께(Life Is with People)』는 동유럽 유대인 슈테틀의 생활을 다룬 획기적인 연구로 널리 읽혔다.
1955년 9월 오를로프가 상원 국내안보소위원회에서 그의 이름을 밝혔다. 그해 봄 그는 이미 레이스의 미망인 엘리자베트 포레츠키를 찾아가 “20년 넘게 NKVD 요원이었다”고 고백했다. 청문회에서 그는 파리 시절만 인정하고 미국에서의 활동은 부인했는데, 베노나 문서로 거짓임이 드러났다. 위증죄 유죄 판결이 항소심에서 뒤집힌 뒤 재심을 거쳐 1962년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통증을 문화별로 비교한 『고통 속의 사람들』(1969)을 내고 연구를 이어 갔으며, 1990년 숨졌다.